“정 작가는 천재예요, 천재. 나전 감각이 탁월해요. 5년 걸릴 걸 석 달 만에 깨쳐버렸어요.”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해 온 서양화가 정직성(44)씨가 붓 대신 나전(자개를 무늬대로 잘라 박아 넣거나 붙이는 칠공예 기법) 도구를 손에 쥐었다. 지난 23일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가구단지길 청봉옻칠공방 아리지안. 정씨는 끊음질 기법(나전을 채 썰듯 잘라내는 방식)으로 잘라낸 나전 조각들을 상사칼로 백골(나무판)에 붙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에게 나전 기술을 전수한 나전칠기 명인 유철현(67)씨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청봉은 유씨의 호다. 정씨는 다음 달 1일부터 서울 용산구 아트딜라이트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어둡고 빛나는 순간’을 앞두고 있었다. 작품 대부분은 전시장에 보내고 마지막 작품을 작업 중이었다.
나전 작업은 손이 많이 간다. 나무판에 삼베를 붙이고 옻칠을 5, 6차례 해서 표면을 매끈하게 한 뒤 거기에 자개를 붙여 작품을 만든다. 이게 끝이 아니다. 자개 위에 다시 옻칠해 틈을 메꾼 뒤 닦아내고, 자개의 거친 표면을 갈아 광택을 낸다. 공정이 복잡해 한 작품을 만드는 데 6개월 정도 걸린다. 하도 손이 많이 가서 유튜브에서 극한직업으로 소개될 정도다. 자개는 흰색을 내는 진주조개, 청록색을 내는 뉴질랜드산 조개, 흑색을 내는 흑진주 조개, 오색을 내는 색패 등 다양하다.
“자개의 표면색이 균질하지 않아요. 그게 강점이에요.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져요. 즉흥성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전통 회화에서 말하는 나무나 바위의 준법, 원근법과 깊이감의 표현까지 가능해요. 보세요. 촘촘히 붙이냐, 성기게 붙이냐에 따라 필획 같은 강약을 줄 수 있어요. 제게 나전은 붓질이나 마찬가지예요.”
자개를 가지고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는 더러 있다. 대개 구상적이거나 패턴적인 접근을 했다. 이와 달리 정씨는 대상을 추상화하고 표현주의적 접근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아트딜라이트갤러리에 가봤더니 흐드러진 밤의 벚꽃도, 격랑이 이는 제주의 바다도, 역광이 비치는 곶자왈도 있었다. 자동차 엔진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기계 시리즈까지 나전기법으로 거듭나 있었다. 끊음질 기법의 바다는 포효했고, 타발 기법(잘게 깨트리는 방식)의 바다는 포말이 눈부셨다.
정씨가 ‘나전 회화’를 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4월 유씨를 만나면서부터다. 두 사람은 자개농을 수집하는 ‘자개농 덕후’였다. 덕후끼리 중고거래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유씨의 자개농 컬렉션을 구경하러 공방에 오게 된 정씨는 유씨가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옛 매화 그림을 펼쳐 놓은 걸 봤다. 정씨는 유화로 ‘밤 매화’ 시리즈를 해오던 터였다. 매화 시리즈를 자개로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렇게 현대미술 작가와 전통 장인은 의기투합했다. 유씨 가족이 이끄는 아리지안공방(대표 유지안)에서 전폭적인 후원을 했다. 계약을 맺어 모든 재료와 기술 협력을 한다.
“자개는 탁월한 재료입니다. 공예로만 끝내기에는 재료가 갖는 물성이 아깝지요. 이걸 현대미술로 풀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장인은 정교함에서는 뛰어나지만, 배색과 배치 등 표현의 상상력에서는 한계가 있었거든요.”(유씨)
“자개는 물성이 강하기 때문에 회화 쪽에서 하려면 추상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해요. 제가 딱 맞아요.”(정씨)
유씨는 전남 순천 출신으로 집안 형제의 자개장 제작 공방에서 기술을 배웠다. 군대 제대 후인 1978년부터 서울에 나전칠기 제작 공방을 열었다. 87년 청와대 영빈관에 설치할 나전칠기 거실장 제작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자개농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특별소비세가 부과될 정도의 고가 사치품이었다. 좋은 것은 강북의 집 한 채 값보다 비쌌다. 하지만 아파트 문화가 대세가 되면서 외면받고 있다. 나전 기술은 현대미술의 옷을 입고 날개를 달 수 있을까. 두 사람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나전 기술은 한국이 세계 최고예요. 해외선 그걸 인정하는데 우리만 그걸 몰라요. 앞으로 해외아트페어에 진출해 진가를 인정받고 싶어요.”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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