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당시 스무살 청년이었던 임수상(92)씨는 빨치산 대원에게 가족을 잃었던 그날의 밤을 생생히 기억한다. 눈앞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두 동생이 손이 묶인 채 학살 현장으로 끌려갔고 임씨만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임씨는 자신의 가족을 포함해 기독교인 30여명이 희생된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교회’ 집단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다.
26일 경기도 김포 자택에서 국민일보와 만난 임씨는 자신이 겪은 참혹했던 당시의 기억을 들려줬다. 1950년 11월 5일 저녁 임씨는 가족들이 먼저 끌려 간 곳으로 손이 묶인 채 끌려갔다. 그곳에는 임씨 가족을 포함해 3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앉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할아버지와 포옹하려 했지만 빨치산 대원 중 한 명이 할아버지의 머리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수차례 내리찍었다고 한다. 임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나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며 눈물을 훔쳤다.
자정을 넘길 때쯤 빨치산은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한다”며 끌고 온 사람들을 마당에 일렬로 세워 인근 하천 쪽으로 끌고 갔다. 대다수는 교육을 받으러 간다는 말을 믿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임씨는 “교인들이 학살 장소로 끌려가면서 다 같이 ‘요단강 건너서 다시 만나자’는 찬송가를 나지막이 불렀다”고 기억했다. 임씨는 죽음의 현장으로 끌려가던 도중 손을 묶은 끈을 풀고 산길로 달아나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임씨는 그간 6.25전쟁 중 기독교인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국가가 무관심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죽은 사람을 담보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에 70년이란 세월을 보냈다”며 “그런데 그동안 대통령과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토로했다. 아흔이 넘는 임씨가 자신이 겪은 사건의 진실 규명에 나서게 된 것은 보상금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잃었던 그날의 진실을 찾기 위해서다. 일가족이 희생된 현장에서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컸기 때문이다.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집단 학살의 희생자가 된 원통함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가시지 않았다. 임씨는 “(전쟁 발발 후) 배를 빌려서 부산으로 피난을 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교회 장로였던 할아버지가 ‘예수 믿는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냐’며 마을을 떠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예수님을 믿다가 가족이 전부 죽어서 정작 나는 다니던 교회도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며 “다만 내가 아흔이 넘었는데 시간을 더 끌지 말고 무슨 결말이라도 속히 나와서 죽기 전에 (결말을)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1월부터 임씨 가족이 사망한 상월교회 사건 등 40명의 기독교인 학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해왔다. 추가로 진실규명 직권조사에 착수해 종교인 학살 사건의 전체 피해 규모를 확인할 방침이다.
글·사진=김판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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