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감염병 매뉴얼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인색했다. 매번 국가적 재난이 터진 뒤 시스템의 구멍을 메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뒤늦게 나오지만 곧 잊혀 졌고, 이번에도 약자는 그저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다. 국민일보는 중증장애인, 한부모가정, 비혼가정, 조손가정, 홀몸노인들이 지난 한 달간 살아온 이야기를 연이어 보도한다.
약자에 더 가혹한 재난 ⑤전염병 매뉴얼엔 약자 배려가 없다·<끝>
“통장을 문밖에 걸어둘 테니 먹을 것 좀 사다주세요.”
대구의 한 재가노인돌봄센터는 지난달 27일 이모(80) 할머니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는 미혼의 독거노인이어서 돌봐줄 가족이 없다. 평소에도 제대로 걷지 못해 목발에 의지하며 살았다. 지난달 24일 대면접촉 금지령이 내려와 생활지원사 방문이 중단되자 할머니는 집에서 혼자 버텼고, 생필품이 다 떨어져 긴급 호출을 한 것이다. 이날 활동지원사는 쪽파, 명태포, 김자반 등 6가지 식재료 4만6000원어치를 사다 드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지난해 노인장기요양 등급을 신청했다가 탈락했다. 대신 ‘등급외 A’로 분류돼 노인맞춤돌봄서비스를 이용했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계층 등 형편이 어려운 6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일시적으로 가정을 방문해 식사 준비나 청소 등을 도와주는 서비스다. 노인장기요양등급 대상자 중 희망자는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방문요양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할머니처럼 차상위 복지계층에 대한 지침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매뉴얼이 마련되지 못한 빈 곳은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이 몸으로 채우고 있다. 개인적 판단에 따라 지침을 어기고 복지서비스를 전달하다 보니 혼선이 크다. 직접 가정을 방문해서 아동이나 노인의 상태를 확인하는 곳도 있지만, 대응을 못 하는 시설도 많다.
감염병은 복지 취약계층의 삶을 더욱 할퀴고 들어왔다. 역대 최악의 전염병 사태여서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속출한 측면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애초 재난 대응 매뉴얼에 약자에 대한 배려가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활동보조사의 도움 없이는 혼자 지낼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홀로 자가격리해야 하는 지침은 정부 매뉴얼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명확히 드러내는 사례다. 그래서 재난이 터지면 취약계층은 재난약자가 된다.
우수명 대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에서는 복지와 의료 시스템이 분리돼 운영되고 있어 재난에 알맞은 사회복지 매뉴얼이 없는 상황”이라며 “재난 시 취약계층을 위한 지침과 사회복지서비스 전달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정부는 격리와 시설 폐쇄 위주의 대책을 내놨다. 매뉴얼이 미흡한 상태에서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임기응변적 조치였다. 이는 복지시스템에 의존해왔던 취약계층의 삶을 곧 위태롭게 했다.
“어머님을 모시고 가셔야 합니다.” 송승민(가명·60)씨는 87세 노모가 다니던 주간보호센터 전화를 받았다. 인근 병원에서 확진 환자가 나와 센터를 폐쇄해야 한다는 통보였다. 센터 간호사들이 해당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는 등 왕래가 있었던 곳이라 불가피한 조치라고 했다.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집에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다리가 불편해 제대로 걷지를 못해요. 혼자서 화장실에 가려면 엉금엉금 방을 기어야 하고 화장실에서도 겨우 일어납니다. 정신도 맑지가 못해 정상적인 대화도 힘들어요. 혼자서는 식사도 어려우니 누군가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 상황입니다.”
노모와 단둘이 사는 그는 직장과 돌봄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어머니를 집에 혼자 방치해 둘 수는 없고, 직장을 완전히 그만두고 어머니에게만 매달리면 생활이 안 되고….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데, 어떡합니까. 그만두면 나중에 새로운 일자리 구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는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 사정을 알고 있는 센터 측에서 대구시 사회서비스원 긴급 돌봄 서비스를 소개해 줬다. 하루 3시간짜리 방문 서비스다. 궁여지책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일을 그만둘 수 없어 몇 시간의 방치는 불가피하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이나 장애인 같은 취약 계층의 생활을 위한 필수 복지 서비스가 중단돼서는 안 된다. 시설이나 방문 서비스가 필요한 복지 수요를 선별해 내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 “독일은 단축노동수당을 확대해 재난 시 월급을 못 받는 경우나 지역 자영업자들 소득손실까지 파악해 이를 보존해 준다”며 “한국도 고용센터를 통한 긴급임금지원을 고려해 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국가가 지나친 공포와 과잉 대응을 초래한 측면도 있다. 혹시라도 잘못된 일이 벌어질 경우에 대한 부담감이 격리와 시설 폐쇄 등 강경 대책에 집중된 결과를 낳았다”고 진단했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장도 “코로나19 대응도 중증 확진자를 먼저 하듯, 전염병 재난 때 고령의 노인이나 만성질환자를 어떻게 대응할지 통일되고 체계적인 지침이 마련돼야 한다”며 “지역 복지관이 대면, 비대면 서비스 수요자를 명확히 구분하고 특수성을 고려한 접근이 이뤄질 수 있는 명확한 지침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재난 시 지역 사회의 복지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비상 플랜 마련도 해법으로 제안했다. 김기현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재난이 발생하면 복지지관 인력들도 활발히 활동할 수 없어 취약계층이 더 어려워지는 상황”이라며 “거점기관을 둬서 비상시 복지대상별로 묶일 수 있는 조직체계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재난 상황에서 요양시설이나 복지관별로 개별 대응하지 않고 인력을 유동적으로 조절해 복지수요를 컨트롤 하는 방식이다.
우수명 교수도 “전국 사회복지사들만 해도 수십만 인력이 있다. 매뉴얼만 있으면 긴급구호나 케어 등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만큼 재난 시 인력풀 활용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5년 전 메르스 사태 때도 자가격리 대상자가 된 중증장애인들은 돌봐줄 사람이 없어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확진자가 나온 병원에 입원했다가 활동 지원자들이 겁을 먹고 지원을 끊어 오도 가도 못한 장애인도 있었다”며 “미리 인력풀을 구성해놓고 비상시에 투입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웅빈 김판 임주언 박세원 기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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