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이어지면서 시원한 그늘과 계곡물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여름에 더운 것은 마찬가지였을 터. 양반 체면에 훌러덩 벗고 물에 들어갈 수는 없어 흐르는 물가에 앉아 시 한 수 읊으며 잠시나마 땀을 식혔을 것이다.
옛 선비들은 산이 수려하고 물 맑은 곳에 정자를 세우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읊었다. 경남 함양은 예부터 8개 못과 8개 정자가 있다고 해서 ‘8담(潭) 8정(亭)’으로 불렸다. 대표적인 곳이 화림동 계곡이다. ‘영남 정자의 진수’를 보여주는 정자들이 옛 선비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화림동 계곡에서 첫손으로 꼽히는 정자가 농월정이다. ‘밝은 달밤에 한 잔 술로 계곡 위에 비친 달을 희롱한다’해서 이름 붙여졌다.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대첩에서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머물면서 시회를 열기도 하고 세월을 낚기도 했다는 곳이다. 2003년 불에 타 사라진 것을 다시 복원했다. 옛 아름다움을 다소 잃었지만 울창한 송림이나 계곡물을 끼고 방대하게 펼쳐진 너럭바위가 흐르는 맑은 물과 어우러져 여전히 장관이다.
농월정에서 거슬러오르면 동호정이 나온다.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큰 데다 화려한 단청을 자랑한다. 동호정 안내문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등에 업고 신의주까지 피란 갔던 동호 장만리 선생을 추모해 1890년쯤 세운 것’이라고 적고 있다.
정자로 오르는 계단이 독특하다. 비스듬한 통나무에 발디딜 곳을 만들었다. 정자에 올라 계곡을 바라보면 수백 명이 앉을 법한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해를 가릴 만큼 넓은 바위’란 뜻의 차일암이다. 정자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중도리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문 청룡과 황룡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어 군자정이다. 조선 성종 때의 성리학자이며 조선 5현에 포함되는 정여창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다듬지 않아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 들쭉날쭉한 다릿발에 무게를 지탱하며 자연스럽게 올라앉아 있다. 나뭇결이 살아 있는 무채색이었던 정자는 최근 채색되면서 소박한 맛을 잃었다.
군자정 50m 위에 거연정이 있다. 전시서 선생의 7대손이 1872년 지었다. 계곡 가운데 기암괴석 위에 우뚝 선 채 구름다리와 어우러지면서 빼어난 경관을 만들어 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풍류가 느껴질 정도다. 정자의 기둥들이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게 다듬어 세워져 있다.
화림동 계곡 오른쪽으로 우뚝한 산이 황석산(1192.5m)이다. 산봉우리 주변에 노르스름한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안의(安義) 고을 민초들의 호국 열정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정상 바로 아래에 자연 암릉을 이용한 요새 같은 황석산성이 이어진다. 정유재란 당시 의병과 백성들이 왜군 7만5000여 명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성은 함락되고 함양 군수 조종도 등 500여명이 순국했다고 한다. 남자들이 모두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부녀자들은 적들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며 바위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피바위라 이름 붙은 바위가 애잔한 역사를 대변해준다.
정상에 서면 온 사방에 고봉준령들이 첩첩이 물결치듯 이어진다. 북으로 거망산을 지나 수망령 너머 덕유산이 조망되고 금원산, 기백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남쪽에는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지리산 주능선의 영봉들이 마루금을 이어간다. 시원한 풍경이 올라갈 때의 수고를 말끔히 보상해 준다.
여행메모
한우 갈비찜·갈비탕과 오곡밥 ‘맛깔’
‘세계문화유산’ 남계서원도 둘러볼 만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통영대전고속도로 서상나들목에서 내린다. 26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20여분 가면 경남 함양의 거연정이다. 거연정에서 군자정, 동호정, 람천정을 거쳐 새로 지은 농월정까지 목재데크 등으로 이뤄진 선비문화탐방로가 개설돼 있다. 황석산에는 다양한 등산로가 있다. 유동마을회관에서 연촌마을을 거쳐 황석산성으로 오르는 코스가 인기다.
함양군 안의면은 한우 갈비찜과 갈비탕으로 유명하다. 오곡밥도 빼놓을 수 없다. 쌀·찹쌀·차조·찰수수·흑미로 따로 밥을 지어 맛깔스러운 반찬과 함께 푸짐하게 내놓는다.
함양군이 운영하는 용추자연휴양림에서 묵을 만하다. 용추계곡 옆에 숙박동인 산림휴양관을 비롯해 휴양림식당, 오토캠핑장 등이 조성돼 있다. 바로 아래 용추폭포가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조성한 한국 최초의 인공림인 상림도 둘러볼 만하다. 최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계서원도 빼놓을 수 없다.
함양=글·사진 남호철 여행전문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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