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군은 농촌지역 주거문화 향상과 귀농·귀촌인의 조기 정착을 위해 농촌주택개량사업 신청을 접수한다고 18일 밝혔다. 접수는 22일부터 다음 달 23일까지로 농촌주택개량사업은 해당 읍·면사무소, 귀농·귀촌 신청자는 군 도시주택과로 하면 된다. 농촌주택개량사업 대출한도는 신축의 경우 최대 2억원으로 20년 상환 조건에 연리 2% 저이율의 혜택이 주어진다. 단 단독주택 연면적이 150㎡이하여야 한다.
<3> 한국 동계올림픽 사상 첫 메달리스트 김윤만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 출전
첫 메달 유력했던 쇼트트랙 경기 하루 전
빙속 1000m서 1위와 0.01초 차 깜짝 은메달
“이전엔 나무만 봤다면 체육행정가로 숲을 본다
올림픽 2연패 성공한 이상화 요즘 자신감 넘쳐
고다이라가 쫓기는 입장돼 금메달 가능해 보여
이승훈·모태범도 메달 딸 수 있는 능력 충분해
후배지만 긴 시간 자기관리 잘 한 건 존경스러워
이젠 훈련 욕심내지 말고 부상 방지 하는 게 최선”
김윤만(45) 대한체육회 대회운영부 과장은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깜짝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에 동계스포츠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선사했다. 당시 그의 메달은 기대 밖이었다. 다음 날 열리는 남자 쇼트트랙에서 메달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최초의 동계올림픽 메달에 국내 취재진은 다급하게 김윤만을 찾았다. 시상식 현장에 준비된 국내 방송사 카메라가 없어 일본 NHK 카메라를 급히 빌려 촬영할 정도였다. 파마머리를 한 만 19세 대학생이 1948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이후 이어진 대한민국의 44년 노메달 한을 푼 것이다. 김 과장은 “예상외의 메달을 딴 자신처럼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할 후배들도 자신감을 갖고 즐기는 마음으로 임하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조언했다. 지난 4일 서울 송파구 서울올림픽회관에서 만난 김 과장은 마무리 시점인 지금 선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 방지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당시 스피드스케이팅은 주목을 덜 받았다. 최초의 깜짝 메달이 나왔는데 기대를 했었나.
“당시만해도 다음 날 열리는 남자 쇼트트랙에서 메달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올림픽에 앞서 같은 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세계 정상급 선수가 많아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나조차도 메달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주니어 무대에서 우승을 한 게 동기유발이 된 것 같다. 올림픽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올림픽이라는 가장 큰 대회에서 긴장할 수 있었지만 즐긴다는 마음으로 나서 제 능력보다 120% 정도의 기량을 선보였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0.01초 차로 안타깝게 금메달을 놓쳤다. 메달색이 바뀌었다면 동계올림픽 최초 메달인 동시에 최초 금메달이라는 기록을 남겼을텐데.
“지금 생각하면 아쉬울 수 있지만 당시엔 2등이 된 것도 믿기지 않았다. 전광판에 ‘2’라는 숫자가 얼핏 보였지만 다른 사람 것인줄 알았다. 이영하 감독님이 내게 손을 번쩍 드시는 모습을 보고 ‘2등 맞구나’를 확신했다. 지금 회상해보면서 ‘1등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금메달을 못 딴데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정말 기쁘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금메달을 차지했다면 다시 올림픽에 도전할 생각을 못했을 것이고, 선수 생활도 그만큼 짧아졌을 것이다.”
-은메달 이후 1994 릴레함메르·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했는데 기대보다 메달권에도 진입하지 못하면서 성적이 저조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가.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때는 조편성에서 운이 없었다. 함께 달리던 다른 선수가 넘어져 진로 방해가 됐고 재경기를 치렀다. 스피드스케이팅이 기록 종목이기 때문에 굉장히 섬세하다. 작은 동작 변화에 생길 수 있는 0.01초에 순위가 바뀐다. 그런데 재경기를 치르게 되면서 김이 샜고 정상적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다. 1995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선 우승을 차지했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는 장비 적응 문제에 시달렸다. 지금은 보편적인 클랩 스케이트(탈착식 스케이트)가 처음으로 도입됐다. 클랩 스케이트는 100의 힘을 가하면 80 정도의 힘을 받았고, 일반적인 스케이트는 50 정도에 그쳤다. 그래서 클랩 스케이트가 스피드스케이팅계를 휩쓸었고 거기에 적응하는 과정을 가졌다. 그런데 내 발엔 잘 맞지 않고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장비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다. 나가노에서 돌아온 후 후배에게 길을 열어줘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야 후배들도 성장할 수 있다고 봤다.”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 이상화가 라이벌 고다이라 나오(일본)에게 계속 밀리는 느낌이다. 최초의 메달리스트로서 어떻게 보는가.
“이상화가 세계 최정상급 기량을 가졌다는 건 2010 밴쿠버·2014 소치 동계올림픽 500m에서 금메달을 따 2연패에 성공했다는 점이 입증한다. 현재의 차이는 부상 때문으로 보인다. 국제빙상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대회를 치르면서 기록 차가 줄어들고 있다. 스피드스케이팅엔 심리적 부분이 많이 작용한다. 올림픽 2연패에 성공한 이상화가 점차 페이스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상화 본인도 자신감이 넘친다. 오히려 고다이라가 쫓기는 입장이 되고 있다. 하면 할수록 이상화가 잘 쫓아가고 있기 때문에 올림픽에서 충분히 뒤집어 금메달도 가능할 것 같다.”
-최초의 메달리스트이자 스피드스케이팅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이상화는 물론 이승훈과 모태범 모두 메달을 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후배들로서 기대가 크다. 셋 모두 올림픽 3회 연속 출전이고 메달도 있다. 후배지만 존경스러울 정도다. 긴 시간 동안 메달을 위해 철저한 자기관리를 했다는 것이다. 다만 남은 기간 동안 기량을 끌어올리지는 못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 방지다. 또 심리적 부분이 중요하다. 대회를 코앞에 두면 대부분 선수가 시상대에 올라가는 꿈이나 넘어지는 꿈을 꾼다. 운동 쪽으로만 생각하다 보면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될 수 있다. 다른 관심사도 생각하면서 심리적 부담을 덜어야 한다. 무리한 훈련보다는 자기 기량을 유지하고 욕심내지 않아야 실전에서 더 나은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다. 특히 2등을 했다고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올림픽 무대에 선 것 자체가 선수 생활에서 큰 보람이 된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선 대표팀 코치로 나서기도 했다. 지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체육행정가를 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을 마치고 선수 생활을 끝냈다. 이후 대표팀 코치를 맡았는데 지도자의 역량을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채 선수의 입장에서 후배를 가르쳤던 것 같다. 능력의 한계를 느꼈고 아무나 코치를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대한체육회에 입사한 후 스포츠를 더 넓은 시야로 볼 수 있게 됐다. 선수 때는 나무만 봤다면 체육행정가가 된 이후엔 숲을 보고 있다.”
김윤만 과장은
1990년대 제갈성렬과 함께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동계스포츠 사상 첫 메달을 따면서 우리나라 체육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2006년 대한체육회 스포츠외교 인력 양성프로그램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했고 2008년 신입사원 공채를 통해 대한체육회에 입사했다. 선수출신으로 드물게 전문행정가의 길을 걸으며 인생 2막을 열어젖히고 있다.
글=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 사진=최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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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브리핑] 연천군, 농촌주택개량사업 신청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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