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 잡았던 일본이 황금기를 되찾기 위해 다시 칼을 갈고 있다. TSMC 같은 해외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보조금을 공격적으로 지원하고 자신들의 강점인 소재·부품·장비 기술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이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 필요성은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세제 혜택이나 금융 지원 같은 간접 지원 위주를 하는 한국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준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코트라(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는 14일 펴낸 ‘일본 반도체 산업정책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일본의 반도체 산업정책의 흐름을 상세히 소개했다. 일본 반도체 시장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개별 기업 기술력과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토대로 1990년대 초반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1990년 기준 세계의 반도체 제조사 매출 1위부터 3위까지가 NEC,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 기업이었다.
하지만 이후 통상 여건의 변화와 버블경제 붕괴, 구조조정 실패 등이 겹치며 기업 경쟁력이 약해지면서 한국 미국 대만 기업에 줄줄이 반도체 시장 주도권을 내줘야 했다. 2022년 기준 세계 반도체 제조사 매출 10위권에 일본 기업이 단 한 곳도 들어가지 못했다.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세계 매출 1위, 3위를 기록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에 일본은 반도체 산업정책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정책 핵심은 자국 내 반도체 생산기반을 확보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가 일본 내 공장을 짓도록 국적을 따지지 않고 정부 보조금을 퍼부었다. TSMC 설비를 유치한 건 일본 내 수요가 큰 12~28㎚(나노미터) 로직 반도체 수급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다는 게 보고서의 분석이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년간 일본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기금은 모두 3조8000억엔(약 36조7000억원)에 달했다. 특히 첨단반도체와 기존 반도체를 가리지 않고 생산설비 투자에 보조금을 지원했고, 첨단반도체 관련 연구개발도 지원했다.
보조금 같은 정부 재정 지원이 없는 한국과는 대비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한국 정부도 지난 4월 ‘글로벌 반도체 경쟁력 선점을 위한 재정투자 강화 방안’을 발표하며 반도체 지원 규모를 33조원까지 늘리겠다고 공언했지만, 여전히 정부의 지원 대부분은 간접 지원 위주다. 보고서는 “반도체 업계에 대한 단기적 세제 혜택을 넘어 보조금과 대출·인프라 등 실효성 있는 중장기 재정지원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반도체 시장을 경제·안보 관점에서 접근하며 정부가 기술 유출에 칼을 빼 들고 있는 부분도 한국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반도체 기술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정부 펀드인 산업혁신투자기구(JIC)가 포토레지스트 등 핵심소재 기업을 인수했다.
반도체 소재·부품 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48%로 압도적이다. 반도체 장비 시장 세계 점유율도 미국(35%)에 이어 31%로 세계 2위다. 한국은 소재·부품 시장 점유율은 13%, 장비 시장 점유율은 2%에 머무는 실정이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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