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살 청년 김모씨는 18살 고등학생 때부터 돈을 모았다. 신문 배달부터 각종 알바까지 안해본 일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은 이유는 볕이 들고 깨끗한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20대에도 지옥고(지하방, 옥탑방, 고시원)를 맴도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8년 뒤 김씨는 4500만원의 전세 보증금을 마련했다. 신림동에서 전세 계약을 마치고 김씨는 생각했다. “드디어 서울에 집다운 집이 생기는구나….”
하지만 신림동 전셋집은 대한민국에서 ‘내집’이 아니었다. 계약기간이 만료됐지만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알고보니 집주인은 김씨의 돈을 사채를 갚는데 모조리 썼다. 김씨 이외에도 이미 4~5명의 임차인이 피해를 입었다. 모두 합치면 최대 3억~4억 규모였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돈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중요한 건 세입자의 권리가 아니라 집주인의 권리였다. 집값이 조금만 떨어져도, 재산세가 몇푼만 뛰어도 온나라가 들끓는다. 하지만 세입자의 사기당한 전세금 몇푼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집주인의 사기 혐의를 입증해 벌을 받게 할 수 있지만 돈을 받을 방법은 없습니다.” 잃어버린 전세금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김씨가 들은 최선의 조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싫은 집주인 전화
2015년 기준 주거 빈곤상태에 놓여있는 서울의 청년가구는 약 30%다. 고시원에 거주하는 가구의 75%는 2030세대였다. 8년 넘게 전세 자금을 일명 ‘깡통 전세 사기’(주택담보대출금과 전세보증금의 합이 현재 집값과 같거나 더 높아서 집을 팔아 전세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는 주택)로 날린 김씨처럼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청년도 부지기수다.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권지웅 이사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청년세대의 부동산 불평등 문제 토론회’에서 “자산을 확보하지 못한 청년은 자가주택은커녕 높은 보증금으로 양질의 전월세 주택을 마련하기조차 어렵다”고 전했다.
29세 이하 청년의 80%가 평균 200만원 미만의 첫 월급을 받는다.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200만원 이상을 버는 상위 20% 청년은 자신이 버는 소득 중 9.2%(대략 18만원)를 저축했다. 서울 중위 가격 아파트가 9월 기준 8억7000만원임을 고려할 때, 상위 20%의 청년들이 월 18만원씩 꼬박꼬박 저축한다고 해도 서울의 중위 가격 아파트를 사는데는 무려 4800개월, 정확히 400년이 걸린다. 나머지 80%의 청년들은 말할 것도 없다. 자산 상속 여부가 사실상 주택 소유 여부를 결정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이니 일단 집 소유는 청년들의 인생 목표에서 아예 지워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전월세는? 시장에서도 청년은 절대적인 ‘을’이었다.
조혜진(23)씨는 “대학생이 서울에서 조건에 맞는 저렴한 집을 마련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전세 5000만원, 월세 55만원짜리 지금 사는 집도 몇 달동안 부동산을 헤매며 겨우 구했다”며 “집주인을 잘못 만나면 어려움이 많다. 샤워기가 고장나고 벽에는 곰팡이가 슬었지만 집주인에게 항의하면 불이익이 있을까봐 아무말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권 이사는 “대한민국 임대 시장에서 집주인의 연락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없다”며 “대부분 집 값을 올려달라거나 계약 종료를 통보하는게 대다수다. 세입자는 집주인이 보증금에 손대지 않을지 계약 만료 1개월 전까지 전전긍긍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월세 주택으로 내몰린 2030 청년 세대들은 집주인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을의 위치에 서있다”며 “세입자의 현실을 이해하고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실질적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 이사는 세입자를 위한 법률적 장치도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현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임차인은 확정일자부여기관에 선순위 전세 세입자가 언제 들어갔는지, 얼마에 계약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이 경우 요청을 받은 확정일자부여기관은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붙어 있다. 임대인의 동의를 받아야만 확정일자부여기관에 정보제공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몇 천만원이 오가는 전세 계약에서 세입자들은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며 “결국 전세 사기를 법적으로 허용하는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소유권은 주거권보다 우선하는가
청년임대주택이 들어오면 집값이 하락한다는 이유로 일부 지역들에서 청년 세입자들을 향해 혐오를 표출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최근에 벌어진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7월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의 행복 임대주택이다. 자격 조건은 19~39세 홀로 사는 청년 중 주거지원시급가구, 한부모가족 또는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장애인, 독거노인 등이었다.
임대주택 추진 소식이 전해진 뒤 주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전단지에 “불특정 다수가 들어오게 되면 주민의 안전과 치안이 불안해진다”며 “성남에서 가장 낙후된 영세 임대촌이 되고 땅값과 집값은 현 시세보다 반값으로 떨어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는 건 집주인들의 ‘집값을 방어할 권리’다. 전단지 속 주장을 살펴보면 주민들은 집값에 대한 권리가 청년들의 살집에 대한 권리보다 앞선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소유권은 주거권보다 앞서는 것인가.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서울청년시민회의 주거분과운영지기 김지선씨는 집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위한 권리를 강조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집을 소유하든, 소유하지 않든 누구에게나 살 집은 필요하다. 그는 “청년들은 전월세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차별과 혐오 표현을 빈번하게 듣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며 “집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불편함이 없이 사는 사회가 되야 한다. 주거의 질, 소비자 보호, 임대기간, 공정 거래 등 청년 세입자의 입장에서 주거권이 실현되도록 프레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지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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