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는 내년 1인당 국민소득이 3만2000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선진국 진입의 척도라는 ‘3만 달러’ 벽을 드디어 넘어서게 된다고 했다. 2007년 2만 달러를 돌파한 지 11년 만이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가 되는 데 17년이 걸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다시 3만 달러가 되는 데 걸린 11년도 선진국에 비하면 2배 이상 길다. 일본과 독일은 5년 만에 3만 달러 벽을 돌파했다.
국민소득 1만 달러를 3만 달러로 끌어올리는 데 무려 28년이 걸렸다. 마침내 그것을 해냈다는 전망이 담긴 2018년 경제정책방향을 확정하는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체감”이란 말을 꺼냈다.
◇ 국민소득 3만 달러 진입… 삶의 질은 여전히 1만 달러 수준
문재인 대통령은 27일 국민경제자문회의 겸 확대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며 “경제 지표가 좋아지고 있지만 국민 개개인의 삶으로 체감되고 있지 않고 있다. 새 경제정책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 개개인의 삶이 나아진다는 걸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자리는 국민들이 달라진 정부정책을 가장 직접 느낄 수 있는 분야”라며 “내년 일자리예산을 신속하게 집행하고 공공기관 채용 2만3000명도 상반기에 집중 배치해 일자리창출이 조기에 가시화되도록 해 달라”고 강조했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되면 높아진 소득만큼 국민의 생활도 나아져야 하는데, 국민소득이란 ‘지표’가 국민의 ‘삶’에까지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기획재정부 이찬우 차관보는 경제정책방향을 설명하며 좀 더 직설적으로 언급했다.
“내년은 선진국 수준인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의 원년이 되겠지만, 실질적인 국민 삶의 질은 1만 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진다는 건 그만큼 국가 전체의 부(富)가 커진다는 뜻이다. 많은 국민이 ‘3만 달러’를 체감하지 못하는 원인은 그렇게 늘어난 부가 특정한 곳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 부의 재분배 기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거나 작동하지 못하는 현실이 국민의 ‘체감’을 가로막고 있다.
◇ 배부른 정부, 배고픈 가계
이런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통계 하나를 한국은행이 발표했다. 27일 공개한 3분기 자금순환 잠정치는 가계 기업 정부 등 국내 경제주체의 자금 사정을 한 눈에 보여주는 지표다. 한마디로 세수 호황에 정부만 여윳돈이 늘었고, 가계는 자금운용 규모가 줄었다. 세금이 그렇게 많이 걷힐 만큼 한국인의 부가 증가했는데 가계 살림은 쪼그라든 것이다.
정부의 순자금운용 규모는 3분기 18조원을 기록해 2013년 3분기 이후 4년 만에 최대치였다. 순자금운용은 예금 보험 주식 등으로 굴리는 돈(투자원금)에서 빌려 온 돈(조달자금)을 뺀 여윳돈을 가리킨다. 한은 관계자는 “올해 3분기 정부의 국세 수입이 69조2000억원을 기록해 지난해 같은 기간 63조5000억원보다 크게 늘었다”며 “세수가 일단 좋았고, 하반기엔 정부 지출 규모가 줄어드는 계절적 요인도 있다”고 밝혔다.
반면 가계의 여윳돈은 2분기보다 줄었다. 순자금운용 규모가 9조8000억원으로 2분기 10조5000억원에서 7000억원 가량 줄어들었다. 10월초 역대 최장기 연휴를 앞두고 소비가 약간 증가했고, 3분기 전국 주택 매매량이 27만9000가구로 2분기(25만8000가구)보다 늘어나는 등 신규주택 구입 호조세가 지속된 게 원인이다.
기업(비금융법인)의 3분기 자금부족액은 -1조2000억원으로 2분기(-14조8000억원)에 비해 확 쪼그라들었다. 기업이 가계에서 돈을 많이 빌려 적극적 투자에 나서야 경제 선순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즉 기업의 자금부족액이 많아야 자연스러운데, 한국 경제는 지난해 3분기부터 올해 1분기까지 기업의 순자금운용이 내내 플러스를 기록하는 비정상을 보였다. 불황에 기업이 돈을 쌓아두고 투자 자체를 꺼린 탓이다.

◇ 경제정책방향의 핵심 “삶의 질을 높여라”
정부는 일자리·소득주도 성장을 통해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맞춘 삶의 질 향상을 이루는 데 내년 경제정책방향의 초점을 맞췄다.
우선 내년 1분기에 일자리 예산을 역대 최고 수준으로 조기 집행한다. 공공부문 신규 채용도 확대한다.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1대 1로 전담매니저를 붙여 청년층이 3년간 중소기업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돕는 ‘청년 중소기업 취업보장 서비스’를 도입한다. 육아휴직 후 여성근로자의 고용을 유지하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세액공제를 신설한다. 이런 정책들을 통해 일자리를 올해 수준인 32만개 늘릴 방침이다.
교육을 통한 사회계층 간 이동성을 확대하자는 취지에서 취약계층의 법·의학전문대학원 진학 기회를 확대키로 했다. 혁신성장 방안으로 드론 등 8대 핵심 선도사업에 민관합동 지원단을 구성하는 등 원스톱 지원체계를 구축키로 했다. 핵심 선도사업에는 기존 규제를 일괄적으로 유예·면제하는 ‘규제 샌드 박스’를 우선 도입한다. 혁신기업 성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시행령 등 정부 내 ‘그림자 규제’를 발굴해 원칙적으로 폐지한다.
혁신기업 지원을 위해 2조7000억원 규모의 혁신모험펀드를 조성하고, 기술력 있는 기업을 지원하는 기술금융 규모를 140조원으로 대폭 늘린다. 정부는 올해 3.2%, 내년 3.0% 경제성장률을 달성할 것으로 추산했다. 내년 물가 상승률은 올해보다 0.2% 포인트 낮은 1.7%로 예측했다.
◇ “주거·의료·교육·교통·통신 ‘5대 생계비’ 줄여라”
세부적인 삶의 질 대책은 ‘5대 생계비’에 초점을 뒀다. 문재인 대통령은 주거·의료·교육·교통·통신 분야에서 국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자기공명영상(MRI)과 같은 비급여 항목까지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공공임대주택 공급 물량은 기존보다 1만 가구 더 늘어난다.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는 청년을 위해 대출 방식이 전면 개편된다. 취약계층에는 의학 등 전문대학원의 문이 더 넓게 열린다. 핵심 생계비 부담을 덜어주면서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겠다는 취지다.
주거 분야는 공공주택과 금융을 중심에 뒀다. 노후 공공청사와 유휴 국유지 개발을 통해 공급키로 했던 공공임대주택 물량을 2만 가구에서 3만 가구로 늘리기로 했다. 서민층의 내 집 마련을 돕기 위해 9조8000억원 규모의 디딤돌대출을 제공한다. 금리를 현행보다 최대 0.25% 포인트 깎아줄 계획이다. 연간 600만원 한도의 청년 우대형 청약저축도 신설된다. 저소득층에게 지급되는 주거급여 지급액은 21만3000원으로 1만3000원 오른다.
의료 분야는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보험 개편이 기본 축이다. 내년 상반기 중에 MRI, 초음파 등 비급여 항목에 본인부담률을 차등 적용한 예비급여 제도를 도입한다. 실손의료보험의 보험료도 낮춘다. 상반기에 인하 수준을 확정한다.
교육 분야는 학자금 대출에 초점을 맞췄다. 취업 후 소득 수준에 맞춰 상환 금액이 결정되는 미국형 학자금 대출제도 도입을 검토키로 했다. 학자금 대출 상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상환 기준 소득도 높일 계획이다. 현재는 연간 1856만원이다.
내년 상반기 중으로 고령층 통신비를 1인당 1만1000원 인하하는 대책을 추진한다. ‘100원 택시’를 확대해 농촌지역 고령층의 교통 불편도 해소할 방침이다.
또한 정부는 저소득층을 위한 ‘계층 사다리’를 만든다. 선호도 높은 4개 전문대학원(법학·의학·치의학·한의학)에서 ‘정원 외’로 취약계층을 선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법학전문대학원은 정원 포함 5%와 정원 외 2%, 나머지는 정원 외 5% 선발을 목표치로 잡았다. 사회 이동성을 강화해 취약계층이 고소득 전문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겠다는 취지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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