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 하나. 배우 여진구의 푸릇한 청춘이 무르익고 있다. 학교에 가면 뭐든 신기하기만 한 풋내기 2학년 대학생, 현장에선 경력 13년차에 빛나는 베테랑 연기자. 그는 매순간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만큼 성장하길 반복하는 중이다.
대중을 처음 만난 건 2005년 영화 ‘새드무비’. 아홉 살짜리 꼬맹이는 신통하게도 제 역할을 십분 해냈다. 연기는 나날이 깊어졌다. 선 굵은 연기력이 요구되는 사극에서 한층 빛을 발했다.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는 덤. 까마득한 누나 팬들에게마저 ‘오빠’라 불리는 여진구의 숙명은 그만의 성숙함 혹은 단단함 때문이었으리라.
“저는 매사에 큰 부담을 갖지 않아요. 딱히 아역 이미지를 빨리 벗어야겠다는 생각도 없고요. 연기는 앞으로도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할 거니까. 많은 분들께 저를 보여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아요. 물론 응원 받는 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겠지만요.”
아역 출신 배우들 가운데에서도 특출하게 튼튼한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묻는 질문에 여진구는 이렇게 답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나는 큰 행운을 가지고 있는 배우인 것 같다. 아역 때부터 날 지켜봐주신 분들에게 (내가) 추억이 될 수 있지 않나”라며 웃었다.
한동안 쉼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인 그는 학업과 연기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이번에는 두 작품을 동시에 선보이게 됐다. 지난달 22일부터 방영된 tvN 월화드라마 ‘써클: 이어진 두 세계’와 연이어 31일 개봉한 영화 ‘대립군’이다.
2017년과 2037년 배경의 두 가지 이야기가 펼쳐지는 SF 추적극 ‘써클’에서는 대학생 김우진 역을 맡아 현재 배경의 ‘파트1’을 이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대립군’에서는 광해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다. 영화는 명나라로 피란한 임금 선조를 대신해 임시조정 분조를 이끌게 된 세자 광해가 대립군 수장 토우(이정재)를 만나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가능한 한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려는 건 배우로서 그의 욕심이자 굳은 의지다. 여진구는 “지금은 비슷한 역할을 답습하기보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스펙트럼을 넓혀나가야 할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광해는 여러 작품에서 이미 다뤄진 인물이다. 어떤 식으로 준비를 했는지.
“‘대립군’의 광해는 여타 영화나 드라마에서와 달리 유약한 왕세자의 모습으로 그려져요. 그 점을 잘 살려 연기해보자고 생각했죠. 감독님과 상의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갔어요. 작품에 임할 때마다 참고하는 작품이 한두 개씩 있는데 이번엔 없었어요. 돌이켜 보면 그래서 초반에 좀 막막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대립군’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시나리오 속 광해에 공감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떻게 할지 몰라 방황하는 모습에 마음이 갔어요. 광해는 타고난 장점이 하나 있어요. 비범함이나 용맹함 같은 왕의 자질은 아니고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의도치 않아도 타인에게 믿음을 주는 품성을 지닌 인물인 것 같았어요. 그런 모습이 부러웠고, 배우고 싶었죠.”
-지난 간담회 때 ‘살아가면서 공허함을 느낄 때 이 작품이 떠오를 것 같다’는 얘기를 했는데.
“광해 캐릭터를 연구하면서 ‘내게 광해와 같은 공허함이나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과연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렇다면 광해를 닮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어떤 고난이 찾아오면 ‘맞아, 광해는 그런 어려움을 겪었지’ 떠올리게 될 것 같아요.”
-지금껏 연기를 해오면서 고난을 겪은 적이 있나.
“극복하지 못할 매너리즘에 빠질 정도로 깊은 고난은 아직 느껴보지 못했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웃음). 다행히 성격이 긍정적인 편이라 힘들어하다가도 금세 ‘에라, 모르겠다’ 풀어버리거든요. 지금까지는 잘 극복해왔는데,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대립군’을 만난 게 행운인 것 같아요. 제겐 정말 소중한 작품이죠.”
-사극 경험이 워낙 많아서 연기 노하우가 있을 법도 하다.
“근데 이번에는 전부 다 버린 상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왕세자라는 신분을 떠나 그냥 열여덟 소년이 두려워 도망치고 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죠. 그래서 노하우 같은 걸 생각하지 않고 연기했던 것 같아요.”
-작품에 들어가기 전 ‘무사 백동수’(SBS·2011) ‘해를 품은 달’(MBC ·2012)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 등 전작들을 다시 봤다고 들었는데, 이유가 뭐였나.
“제가 정말 편하게 즐기면서 연기했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극 중 인물 자체에 몰입해서 즐기고 있는 느낌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그 당시 어떻게 연기했었는지 기억이 나나.
“그때는 제가 즐기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냥 연기하는 게 재미있어서 편하게 했죠. 지금은 점차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생기다 보니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요. 그만큼 배우로서 역할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과 무게감이 늘어난 거겠죠. 근데 이번 작품에선 그런 감정을 떨쳐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과거 작품들을 돌아보면서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
“예전에 선배님들이 ‘너 지금처럼 연기해야 된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때 전 ‘당연하죠. 계속 이렇게 연기할 거예요’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죠. 근데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좀 알 것 같아요. 과거 제 연기를 보니 ‘와, 내가 이렇게 순수하게 연기했었단 말이야?’ 싶더라고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 진학을 고민하다가 연극영화과를 택했는데, 학교생활은 어떤가.
“저는 어릴 때부터 현장에서 연기를 배워왔잖아요. 제 또래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연기를 하는지 궁금하더라고요. 그게 제가 대학에 가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였어요. 생각보다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학교에선 주로 연극을 다루는데, 무대 연기는 또 다르더라고요. 지금까지 제가 알던 것과는 또 다른 연기의 이면을 보게 된 거 같아요.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연기 외적으로 느끼는 대학 생활의 즐거움은 어떤 게 있을까.
“다들 20대 초반 청춘들이잖아요. 다 같이 있으면 분위기가 한없이 방방 떠요(웃음). 선배님들과 연기를 할 때는 보통 진지한 자세로 임하곤 하잖아요. 근데 동기들과 있으면 서로 장난치고 편하게 대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자유분방함이 좋아요.”
-앞으로의 연기 방향성 혹은 작품관에 대해 들려준다면.
“지금은 그냥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럴 때라고 생각해요.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혀가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여러 작품을 경험해봤을 텐데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나.
“청춘물이요. 대만 청춘영화 같은 느낌 있죠? 로코는 아니지만 청춘의 풋풋하고 서툰 사랑도 담겨져 있는…(웃음). 지금 제 나이에서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작품을 하고 싶어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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