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해커에 의뢰해 고객정보 11만건 원격해킹한 50대 검거

지난 9월 6일 오후 8시쯤 서울 서초구의 한 모텔로 50대 남성이 들어섰다. 검정색 라운드 티셔츠를 입고 노트북 가방을 든 이 남성은 곧장 7층 객실로 올라가 문을 잠근 뒤 노트북을 켜 원격접속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그는 필리핀에 있는 해커에게 자신의 노트북 사용권한을 넘겨줬다. 대리운전운행정보 관리업체인 A사 서버를 털기 위해서.

해커는 30분 만에 해킹에 성공해 A사 서버를 이용하는 대리운전업체 두 곳의 고객정보 11만5606건을 엑셀 파일 형태로 내려받았다. 파일에는 이용고객의 전화번호, 출발·도착지, 당시 배정됐던 대리운전 기사의 이름·연락처 등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오전 5시쯤 작업이 끝나고, 남성은 모텔을 떠났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이 남성을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고 5일 밝혔다. A사 해킹을 청부한 이 남성은 한국과 필리핀에서 중고 휴대전화 판매업을 하는 양모(50)씨였다. 양씨의 의뢰는 받은 해커는 범죄를 저지르고 필리핀으로 도주한 한국인 M씨. 경찰은 M씨의 정확한 신원을 파악 중이다.

직접 대리운전 콜센터를 운영하기로 마음먹은 양씨는 해커 M씨의 힘을 빌려 A사를 해킹하기로 했다. 고객정보만 있으면 회사를 차릴 수 있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보다 발송단가가 싼 모바일 메신저로 스팸을 뿌리면 경쟁업체들을 충분히 제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양씨는 ‘지사를 설립하게 해 주면 콜 중계 건당 700원을 주겠다’고 속여 A사 서버를 이용하는 한 대리운전업체로부터 접속 아이디(ID)와 비밀번호를 발급받았다.

완전범죄로 끝날 것 같았던 해킹은 보안업체 안랩이 A사의 정보유출 정황을 포착하고, A사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들통이 났다. 수사당국의 눈을 피하려고 모텔 무선인터넷을 이용했지만, 접속 위치가 서초구의 한 모텔이란 것을 파악한 경찰의 끈질긴 탐문수사로 양씨의 정체가 드러난 것.

수사망이 좁혀지자 양씨는 범행 닷새 만에 필리핀으로 도주했다.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 도피생활이 어려워지자 지난달 15일 귀국해 경찰에 자수했다. 이미 양씨는 빼돌린 대리운전 고객정보를 필리핀 현지의 개인정보 수집상에게 헐값에 팔아넘겼다고 한다. 양씨가 받은 돈은 고작 200만원.

경찰 관계자는 “넘긴 고객정보에는 거주지 등 각종 정보가 포함돼 있어 보이스피싱은 물론 다양한 범죄에 악용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찬희 기자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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