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비틀스 성공학
1960년 영국의 리버풀에서 결성된 ‘비틀스’는 한 시대를 주름잡은 전설 의 록밴드다. 록의 고향인 미국을 점령해 수많은 비틀스 마니아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미국 점령 50년을 맞은 이번 달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전한 그들의 성공 비결은 무척 흥미롭다. 한마디로 재능과 타이밍의 절묘한 결합이란 것이다.
리더 격인 존 레넌은 쿼리뱅크 고등학교에 다니며 비틀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아마추어 스키플 밴드 쿼리멘을 결성해 공연을 펼치다 교회에서 폴 매카트니를 처음 만났다. 이후 조지 해리슨과 링고 스타를 영입해 활동하다 1970년 ‘렛 잇 비’를 남기고 공식 해산했다. 이 노래는 원래 혼자였으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이들의 성공 이면에는 1963년 11월 22일 암살로 유명을 달리한 존 F 케네디가 있었다는 데 이론이 없다. 즉 도전과 젊음의 상징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케네디가 갑자기 사라지자 미국인들은 좌표를 잃고 말았다는 것. 바로 이때 비틀스가 혜성처럼 나타나 활력을 찾게 해줬다고 분석한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케네디 암살 당일에도 영국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비틀스는 64년 2월 9일 미국 최고 인기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 나가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TV 최초의 라이브 공연으로 미국 전체 인구의 5분의 2가량(약 7300만명)이 지켜봤다.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젼’의 시작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멤버 가운데 3명이 케네디와 같은 아일랜드계였다는 점이다.
이들의 성장 도시인 항구도시 리버풀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도 성공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 외부와 교류가 많았던 영국 서부의 항구인 이곳에서는 미국의 최신 레코드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엘비스 프레슬리 등 미국 팝 가수들이 세계를 석권하고 있었고, 지리적인 특성상 리버풀은 선진 음악에 다가서기가 용이했다. 모험을 동반한 미국시장 공략 마케팅 전략도 탁월했다.
비틀스 음악과 관련된 상품은 2012년에도 무려 71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할 정도로 아직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바로 음악의 힘, 대중문화의 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아메리카 상륙작전은 한류의 세계화를 꿈꾸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가수 싸이의 성공신화로 자신감도 얻었다. 중국, 일본과 동남아를 석권한 아이돌 가운데 제2의 비틀스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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