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통해 강제징용 부친 묘소 찾은 유연상씨 “국민일보가 기적 만들어”
“며칠간 계속 마음이 들떠 아무나 보면 자랑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그렇게 애태워 찾으려고 해도 못 찾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묘소를 정말 기적같이 찾게 됐습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유연상(67·서울 청담동)씨는 9일 본보 기자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벅찬 심정을 전했다. 유씨의 부친은 일제시대 노무자로 징용돼 사할린으로 끌려갔다가 끝내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서 독신으로 살다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런데 유씨는 지난 3일 인터넷으로 국민일보 홈페이지를 검색하다 우연찮게 아버지의 묘비 사진을 발견하게 됐다. 지난해 11월 16일자 본보 1면 ‘사할린 강제징용 580명 묘 찾았다… 광복 후 처음 정부차원 현지 실태조사 확인’ 기사와 함께 실렸던 조악한 시멘트 비석 사진이었다. 유씨는 전율했다.
“국민일보에 일제 징용자들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는 소식을 듣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했습니다. 하나하나 기사를 보는데 문득 묘비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어요. 뭐라고 써 있나 들여다보니 비석에 아버지 이름 ‘유흥준’이 새겨져 있는 겁니다. 자세히 보니 아버지 편지를 마지막으로 받았던 1976년 당시 저희 식구가 살던 집 주소 동대문구 중화동(현 중랑구)도 적혀 있고, 제 이름 ‘연상’도 적혀 있어요. 그걸 발견한 순간의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유씨의 부친은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2월 고향인 전북 완주에서 스물세 살 나이에 면서기 손에 붙잡혀 징용됐다. 사할린 코르사코프 지역 작업장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해방을 맞았지만 다른 징용자들과 마찬가지로 소련 당국에 억류돼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아버지는 1976년 ‘아들 보아라’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를 유씨에게 보냈으나 이후 다시 소식이 끊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77년 1월 사망했다. 당시 한국과 소련은 미수교 상태여서 공산권 사할린 땅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자수성가한 유씨는 한독약품 이사를 지내다 정년퇴임하고 우여곡절 끝에 2007년 8월 처음으로 코르사코프를 찾아갔다. “아버지 묘를 찾는다고 무작정 발버둥쳤어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공동묘지에 우거진 수풀을 우산으로 샅샅이 헤치고 다녔는데, 결국 실패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한국에 돌아왔지만 자다가도 사할린의 ‘사’자만 들으면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평생 수절한 어머니 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유씨는 내년에 날이 풀리면 사할린을 다시 방문할 계획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34년 만의 첫 성묘가 될 것이다. 본보에 이메일과 전화로 연락해온 유씨는 “일부러 찾으러 간 제 눈에도 안 보이던 비석입니다. 국민일보가 너무나 기막힌 기적을 만들어줬어요. 자꾸 두드리면 열린다는 성경 경구대로, 다른 유족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부모님 산소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유씨의 사연은 일제 강제동원 문제가 지나간 과거사가 아니라, 여전히 수많은 유족들 가슴을 아프게 하는 ‘현재진행형’임을 여실히 웅변하고 있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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