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적 종족주의에 빠진 한국교회

Է:2025-07-17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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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12 장면]
<8> 애국 기독교의 근원

한복차림 시민들이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국민일보DB

우리 세대는 애국심 과잉 시대를 살았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을 매일 외우다 보니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 종교 역시 애국심을 고양할 때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한국사 시간 임진왜란을 배우며 서산대사나 사명당이 승병을 조직해 일본군에 맞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국불교(護國佛敎)’라는 말을 아무런 부담 없이 받아들였다. 반면 ‘황사영 백서 사건’을 배울 때는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민망해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 정부를 정벌해 달라는 매국적 행위였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 승려가 전쟁에 참여한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인간의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조차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과연 존속할 가치가 있었을까. 질문해볼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종교도 애국의 도구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애국심에 있어서 어떤 종교에도 뒤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다. 외국인 선교사가 전해 준 기독교가 애국적 기독교의 시작이었다. 고위 선교사 중에는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는 걸 지지한 이들도 있었지만, 조선 민중과 가까이 지냈던 다수의 일선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에 공감하고 이를 응원했다. 이들을 통해 미국식 애국심을 정당화하는 성경 해석의 틀과 내용이 그대로 전수됐다. 강대국 이집트에 맞선 모세의 출애굽,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이야기를 들을 때 조선 민중은 일제에 맞설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기독교적 애국심에 새로운 깊이와 투쟁력을 더했다. 이 운동의 중심에 있던 길선주 목사는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였다. 기독교가 민족의식의 중심이 돼 가는 흐름을 감지한 일제는 1911년 ‘105인 사건’을 일으켜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됐고 1919년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에도 기독교인의 애국심은 약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내내 무장투쟁, 의열단 활동, 실력양성 운동 등 여러 양상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인은 늘 선봉에 서 있었다. 해방 후 민족정신을 회복할 때도, 6·25전쟁과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도, 기독교인은 늘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 국가 기념일이면 지역 연합단체들이 기념 예배를 개최하고 기도원마다 ‘우국(憂國)의 심정’으로 간구했다. 시대는 달라져도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나라를 위해’ 존재했다.

우리는 다시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애국심은 모든 사람이 가진 보편적인 감정이며 다른 감정을 압도하는 강렬한 감정이다. 각 나라는 저마다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 역사, 언어를 가지고 있고 국민이 이를 자랑스러워하고 그리워한다. 국기를 볼 때 숭고한 감정을 느끼고 국가를 들으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러한 감정은 학교 교육을 비롯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다음세대로 전수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애국심은 맹목적이라는 점이다. 앞이 보이지 않기에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이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과거 민주화 시대 민족·민중·민주를 목표로 삼던 진보 진영의 삼민주의(三民主義)와 결합한 적이 있고 또한 우파 민족주의와도 쉽게 결탁한다. 소위 정치인은 자기 이익을 위해 눈이 먼 애국심에 호소하고 국민은 그들의 선동에 기꺼이 호응한다. 애국심은 전쟁과 테러를 부추기며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차별과 제노사이드를 정당화한다. 애국심 앞에서는 정의나 사랑과 같은 인류 보편적 감정이 멈춘다.

애국심에 종교가 가세하면 그 맹목성은 극대화된다. 애국심과 기독교가 결합하면 종교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초월성이 사라지고 무자비한 권력의지가 강화될 뿐이다. 오늘날 극우적 성향을 띤 자칭 ‘애국 기독교’가 바로 그것인데 절대적이며 종교적인 충성을 강요하고 자기에 대한 모든 비판을 죄악시한다.

맹목적 애국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국가가 가진 이중적 성격 때문이다. 한편으로 국가는 로마서 13장의 설명처럼 정의 실현을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신성한 도구이다. 우리는 국가 안에서 좀 더 넓은 자아를 구현하기도 하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을 배우기도 한다. 반면 요한계시록 13장에 따르면 국가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국민과 교회를 해치는 전체주의의 도구이다. 국가는 신적 형태를 띤 붉은 괴물이요 자기애의 화신이다.

이제는 기독교와 애국심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때다. 기독교는 맹목적 애국심을 살피는 눈이 돼야 한다. 애국심이 성경적 가치를 따르도록 인도하고 국가나 이념을 초월해 이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돕던 저항적 민족주의가 언제부터 타인을 차별하고 압제하는 패권적 민족주의로 변모했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세계주의적 기독교가 애국적 종족주의로 축소돼서는 안 된다.

장동민 교수(백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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