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범선 움직이던 바람, 다시 주목받는다

기계도 엔진도 없던 시절 거대한 배를 움직인 가장 중요한 동력은 ‘바람’이었다. 인류는 바람의 방향을 예측하고, 바람의 힘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카락선, 캐러벨선 등 거센 풍랑도 이겨낼 수 있는 대형 범선이 만들어졌다.

바람을 이해하는 능력은 힘으로 여겨졌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처럼 무역풍과 편서풍 등 바람을 분석해 항로를 개척한 이들만 새로운 곳을 지도 위에 새길 수 있었다. 15~17세기 항해술과 조선술로 무장한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 개척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러나 바람의 시대는 증기 기관의 등장으로 저물어갔다. 1807년 로버트 풀턴이 최초의 증기선 ‘클레먼트호’ 시운전에 성공한 이후 더 이상 바람에 의존하지 않는 선박의 시대가 열렸다. 석탄, 석유 등 다양한 연료가 선박 동력으로 이용되면서 바람은 항해에서 점차 멀어졌다.


잊혀졌던 바람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탄소중립과 글로벌 에너지 전환 흐름이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됐기 때문이다. 국제해사기구는 2050년 ‘넷제로’(탄소중립)를 목표로 탈(脫)탄소 전환에 필요한 규제 도입에 힘쓰고 있다.

이에 대응해 조선사들도 수소, 암모니아 등 친환경 연료를 활용할 수 있는 선박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이 중에는 풍력을 활용하는 움직임도 있다. 바람을 선박의 동력으로 활용해 연료 사용량과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겠다는 시도다.

‘풍력추진 선박’으로 불리는 이 배들은 기존 연료 계통을 유지하면서 풍력 추진 장치를 보조 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쉽게 말해 자동차 산업에서 엔진과 전기모터를 함께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기술과 유사하다.

업계에서는 이미 풍력을 이용한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이 중 가장 주목받는 기술은 로터세일이다. 로터세일은 선박 갑판에 설치되는 원기둥 형태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은 바람이 불면 회전하게 되는데, 이때 주변 공기의 압력 차이가 발생하면서 힘이 생긴다. 선박은 이 힘을 추진력으로 활용해 나아간다.

이 기술은 연료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을 감소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영국 아네모이 마린에 따르면 4개의 로터세일이 장착된 31만DWT(재화중량톤수)급 초대형 유조선을 나이지리아와 중국을 잇는 보니~닝보 항로에서 운영할 경우 매년 1622t의 연료를 아끼고 5044t의 탄소 배출을 감축할 수 있다. 기존 선박에 쉽게 설치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배 위에 날개 형태의 추진 장치를 설치하는 윙세일도 있다. 과거 범선에 쓰인 돛처럼 선박에 장착돼 바람에 의해 발생하는 양력을 이용하는 기술이다. 날개는 정박 중에는 접혀 있고, 항해 중에만 펼쳐진다.

윙세일은 곡물 기업인 카길이 2023년 6개월간 시험 항해에 나서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카길은 229m 길이의 4만3000t급 곡물 운반선 피시스 오션에 높이 37.5m에 이르는 거대한 풍력 날개 윈드윙스 2개를 달았다. 이 화물선은 칠레 남단의 케이프 혼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태평양 북대서양 남대서양 등을 항해했는데, 총 14%의 연료 절감 효과를 보였다고 한다.

카이트(연) 기술도 있다. 카이트는 패러글라이딩 모양의 커다란 연을 선박에 달아 바람의 흐름을 이용하는 원리다. 선박에 설치할 고정 구조물이 윙세일과 로터세일에 비해 적다는 것이 장점으로 거론된다.


국내 조선업계에서도 풍력 추진 기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성장 중인 풍력 추진 선박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다. 시장조사업체 마켓츠앤드마켓츠에 따르면 글로벌 풍력 추진 선박 시장은 2023년 약 3200만 달러에서 2030년에는 약 8억5000만 달러(약 1조1677억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HD현대는 국내 최초로 윙세일을 개발했다. HD현대가 개발한 윙세일은 높이 30m, 폭 10m 규모로 주 날개 양측에 보조 날개를 장착해 추진력을 한층 더 높였다. 최근 육상 시험을 진행한 HD현대는 올 하반기 실제 선박에 장착해 테스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HD현대중공업은 앞서 2022년 한국선급(KR)으로부터 독자적인 로터세일인 ‘하이로터’에 대한 설계 승인을 획득했다.


한화오션은 2019년부터 로터세일 시스템을 자체 개발해왔다. 2021년 노르웨이 DNV선급으로부터 초대형원유운반선와 LNG운반선에 적용 가능한 로터세일 시스템 기본 승인을 획득했고, 현재는 선박 시제품까지 제작한 상태다. 한화오션은 경남 거제에 높이 30m, 직경 5m의 ‘로터세일 실증센터’도 만들고 있다. 내년 완공될 예정이다.


삼성중공업은 지난해 한국선급과 라이베리아 기국(旗國)으로부터 윙세일이 적용된 LNG운반선에 대한 기본설계 인증을 받았다. 해당 운반선은 조타실을 뱃머리에 배치해 풍력 보조 추진 장치 설치 선박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운항 가시성 문제를 해결했다. 삼성중공업은 윙세일과 함께 독자 개발한 공기 저감장치 ‘세이버 윈드’가 선박에 설치되면 연비 개선과 동시에 탄소 배출 감소 효과도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는 “친환경 전환 움직임에 따라 풍력 추진 선박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며 “앞으로 독자 개발된 풍력 추진 장치를 상용화하기 위한 실증연구도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