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야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설치를 위한 특별법 제정에 속도를 내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 한국에서도 40년 가까이 해법을 못 찾은 채 논란만 들끓었던 문제가 드디어 해결의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이 합의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 타협과 거래의 산물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발휘한 ‘협력적 대항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협력적 대항력’은 미국의 숙의 민주주의자 에릭 올린 라이트가 제시한 개념이다. 시민사회가 정부에 대해 견제와 협력을 변주하며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뜻한다. 사회 곳곳에서 흔히 보이는 반대를 위한 반대, 즉 ‘적대적 대항력’과 달리 생산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게 특징이다. 협력적 대항력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절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구체적인 문제 해결을 지향하기 때문에 공동체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산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번 합의가 정치적 타협이나 거래의 전리품이 아니라 협력적 대항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차고 넘친다. 20·21대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된 법안이 22대 국회에서 다시 논의되기까지 지역주민과 환경단체는 정부 측 법안의 과잉과 결핍을 끊임없이 지적하면서도 공식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여야 국회의원들은 공수가 바뀌는 와중에 각자의 정치적 입장과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소통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부 역시 시민사회의 반론을 경청하며 최적의 대안을 찾으려 노력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항의 절차가 정교해지고 협력의 노력이 깊어질수록 법안의 합리성과 수용성도 함께 높아졌다. 특별법이 제정된다면 단순히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를 위한 기술적 해결책을 마련했다는 의미를 넘어 대화와 숙의를 통한 국가적 난제 해결이라는, 한국 민주주의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특별법이 제정된다고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나온 길이 험난했던 만큼 앞으로의 여정도 험악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과정을 통해 우리는 협력적 대항력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조화로운지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협력을 통한 문제 해결이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다는 점도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 문제를 풀어가는 가장 실천적이고 지속가능한 방법이란 점을 증명한 전례가 될 수 있어서다. 남은 과제는 특별법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참여와 협력을 통해 건강한 대항력을 더 키우는 것이다. 한국 정치가 시민사회의 협력적 대항력을 바탕으로 더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나가길 바라며 이번 합의를 이끌어낸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이들의 정치적 성숙함이 앞으로도 더 크게 쓰임받기를 기대한다.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