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의 변화를 들먹이기에 민망한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 벌써 올해의 절반이 지나가는 중이다. 더없이 짧은 봄날이 가버리고 여름에 접어들었는데, 지난봄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할 이유가 있긴 하다.
늦은 봄 우리는 술을 빚었다. 이웃마을 대정읍의 술 다끄는(‘다끄다’는 ‘빚다’의 제주 말) 솜씨 일품인 양조장 청년 사장에게 의뢰를 한 것이다. 지난 가을께부터 생각했던 바였고, 3월에 접어든 산방산 아래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면 그 꽃을 따다가 탁주를 빚어야지, 했다. 봄이 왔고 제주에서 가장 먼저 꽃 피는 우리 마을 사계리 유채 농부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는 콧노래 부르며 신나게 꽃을 땄다. 양조장에선 그 꽃을 가져다 잘 말리길 여러 번에 차 우리듯 꽃수를 내어 술을 익혔다.
꽃뿐만이 아니다. 제주에서도 귀한 산듸(밭벼)로 만들었으니 여러모로 귀한 술이 되었다. 잔치 때 쓰려 만든 것이라 판매하는 건 아니다 보니 술 이름도 마음대로 붙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꽃술답게 이름도 근사해야 한다면서 ‘사계 바당 건너 봄이 오면 유채꽃 피고, 우리는 꽃으로 술을 담갔지’라는 긴 이름을 턱 붙여버린 탓에, 술 이름 지은 나조차도 단번에 술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다.
여튼, 딱 이백오십 병 정도 나온 터라 여기저기 고마운 분들에게 선물하고 나니까 이제 냉장고에 여남은 병뿐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맛이 변해가니 앞으로 두어 달 더 아껴가며 마실 계획이다. 서귀포의 봄을 고스란히 담은 진하고 달콤한 술이라니,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마음이 자꾸 냉장고로 향한다. 향기로운 술은 언제나 미쁘다. 제주는 지형 특성상 쌀농사를 거의 짓지 않았고 워낙 척박했던 탓에 술 빚는 문화가 화려하게 발달하진 못했으나 어디 사람 사는 데 술 빠질 수 있을까.
쌀 대신 좁쌀과 보리로도 멋진 전통주를 다끄는 문화가 있었다. 제주 사람들은 흐린조(차조)와 흐린좁쌀(차좁쌀)을 맷돌에 갈고 익반죽해 떡을 빚었다. 빨리 잘 익으라고 술빚을 떡 가운데 구멍을 내어 도넛처럼 만들었는데, 그 구멍떡이 오늘날 제주 특산물인 오메기떡의 원형이다. 제주 전통주 중 대표적인 오메기술은 오메기떡에 보리쌀로 만든 누룩을 섞어 발효시켜 만들었다.
십 수 년 전 제주 오메기술 취재차 들른 성읍마을 김을정 옹의 정지(부엌)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술 다끄는 날이었는지 약간 취기가 오른 옹께서 내어준 시원하고 톡 쏘는 맛의 오메기주와 묵은지 몇 점이 살면서 마신 가장 맛있는 술이었다. 제주 오메기술과 고소리술 명인으로 무형문화재 반열에 올랐던 옹은 3년 전 돌아가셨고 지금은 그의 며느리와 딸이 제주 술의 명맥을 잇는 중이다.
깊은 속을 갖고, 묵묵히 자연에 기대어 포용하며 창조했던 제주 사람들의 삶이 담긴 제주 술 이야기를 안주 삼아 새로운 건배를. 오늘도 아마 냉장고 문이 열리지 싶다.
고선영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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