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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속 세상] 없는 게 없는 ‘섬마을 로켓배송’… 情도 배달됩니다

권씨네 ‘꿈꾸는 만물트럭’

권씨가 지난 9일 승봉도 선착장에서 만물트럭을 주차한 뒤 잠에 들 준비를 하고 있다. 권씨는 배를 기다리면서 선착장 인근에 침낭을 깔거나 차 안에서 잠을 청한다.

“빵, 우유, 요구~릇트, 오이 50개 1만~5000원.”

지난 9일 인천 옹진군 승봉도에 앰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물트럭을 모는 권병도(66)씨가 섬에 도착해 녹음한 이번 주의 신상품 목록이다. 권씨는 한 주씩 번갈아 가며 승봉도와 대이작도, 자월도와 소야도를 각각 2박3일 일정으로 방문해 섬마을 주민들에게 각종 채소, 식료품, 잡화 등을 판매한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트럭 만물상 동석(이병헌)이 다른 상인에게 물건을 산 주민들에게 화내는 장면이, 권씨가 한 다큐에서 보였던 모습과 흡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권병도씨는 인천 옹진군 승봉도에 내리자마자 물품 정리를 마친 뒤 육성으로 이번 주 판매할 상품들을 녹음한다. 3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50가지가 넘는 채소와 물건 목록을 마이크에 쏟아낸다.

면적 2.22㎢의 작은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트럭이 어느 집 앞에 멈춰 서자 할머니 한 분이 나와 취나물, 매실, 설탕, 두부 등 몇 주는 거뜬히 먹을 식료품을 가리켰다. “배가 하루 한 번밖에 안 댕겨서 이 장사(권씨) 아니면 우린 살도 못 해”라며 바지춤에서 10만원이 넘는 돈을 꺼내 건넸다. 필요한 물품을 문 앞에 놓고 가는 권씨의 트럭은 주민들에겐 섬마을 로켓배송이나 다름없다. 권씨는 거래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주민들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마을 곳곳에 웃음꽃을 피워냈다.

“요런 지갑도 있으면 하나 사다 줘.” 권씨는 주민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며 필요한 물품을 듣는다. 주민들의 냉장고 사정도 꿰뚫고 있다. 그의 비법이다.

2주에 한 번 찾아오는 권씨는 주민들에게 반갑고 고마운 손님이다. 2011년 승봉도에서 주차해둔 권씨의 트럭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에 타 전소됐다. 현장을 지켜보던 주민들은 함께 눈물을 훔쳤다. 석 달이 넘도록 장사를 하지 못한 권씨에게 섬마을 주민들은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고마운 손님들에게 빚을 질 수 없었던 권씨는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고 다시 섬으로 향했다.

너무 많은 물품을 트럭에 욱여넣은 탓에 하루에도 몇 번 물건을 파헤친다. 권씨의 무릎과 손목이 아픈 이유다.

사과를 가득 싣고 덕적도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20여년간 이것저것 담다 보니 지금은 조수석까지 가득 채우게 됐다. 트럭을 몰며 두 딸을 시집보내기도 했다. 이날 장사를 마치고 선착장에 차를 댄 권씨는 “무릎도 아프고 손목도 돌아가고 올해가 마지막일 수 있어. 이제는 이 트럭을 캠핑카처럼 고쳐서 전국 방방곡곡 원 없이 돌아다니다가 좋은 자리 있으면 자리 잡고 여생을 보내고 싶어”라고 말했다. 별빛 아래 잠자리를 마련한 권씨는 오늘도 트럭에 꿈을 싣는다.

“밭에 가 있는 사람들, 바다에 가 있는 사람들, 빠진 것들 다시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자꾸 돌지.” 권씨의 만물트럭은 한눈에 들어오는 승봉도의 마을을 하루에 네댓 바퀴 돈다.
지난 10일 승봉도 선착장에서 권씨의 만물트럭이 대이작도로 향하는 배에 오르고 있다. 목요일에 승봉도에 들어왔던 권씨는 대이작도를 거쳐 토요일에 다시 인천으로 나간다.

승봉도=사진·글 이한결 기자 alwayss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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