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P는 엄마와 자주 다툰다. 화가 나면 참지를 못해 물건을 던진다. 엄마에게 욕을 하기도 한다. 엄마도 화를 내지만 P를 제압하기는커녕 서로 화를 부추겨 급기야 몸싸움이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가족은 함께 할 수가 없고 해체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병원을 찾은 P와 엄마에게 눈을 감고 최근에 서로에게 화났던 상황을 떠올려 보도록 하였다. 그때의 장면을 최대한 생생하게, 어떤 장소였으며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들리는지, 어떤 냄새가 나는지 되살려 보게 하였다. 또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기억해 보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화가 났던 장면에 집중하면 자신과 상대에 대한, 또는 주변에 있던 사람과 관련되어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 떠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때 몸의 반응을 관찰하게 하였다.
이 순간 생각과 감각, 화를 없애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하였다. 생각이 떠오르면 ‘생각’이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감각이 느껴지면 ‘감각’이라고 말하고 감정이 올라오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도록 하였다(화, 억울함, 외로움 등등).
그리고 스스로에 다음 질문을 하도록 하였다. 이 상황에 대해 정말로 무엇이 그렇게 화나게 하는가? 왜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자신에게 주었다. 상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들었었는지. 자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들었었는지, 그 상황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 들었었는지 잠시 떠올려 보게 하였다. 잠시 침묵하면서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였다.
분노는 대개 어떤 상처를 위장한 채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 모녀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딸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P의 행동으로 봐서 당연하다. 하지만 다툼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대부분의 싸움이 그렇듯이). 엄마는 P에게 ‘방 정리를 해라’고 했고, 이 말에 아이가 수긍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P에 대해서 ‘저 녀석은 늘 나를 무시하지, 엄마를 엄마로서 대접하지 않아’ 엄마 자신에 대해서 ‘도대체 어떻게 행동했길래 딸에게조차 이런 취급을 받는 건가? 한심하다 한심해’ 또는 ‘내가 늘 그렇지. 남편은 이런 나를 방치하고 있어, 남편도 날 돌보지 않아. 세상 누구도 날 돌보지 않아. 외롭다. 난 혼자야’라는 생각을 하였다고 했다.
P는 엄마가 방 정리를 바로 하지 않은 자신에게 짜증을 내고 소리 지르면 ‘엄마가 또 시작이야. 엄마는 늘 저렇지. 악마 같아’ 자신에게는 ‘이런 집안에 태어난 게 억울해.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 이런 취급 받다니 난 벌레만도 못해. 그러니 친구들도 날 존중하지 않지. 이런 집에 태어난 내가 창피해’라고 생각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로 분노를 유발하고 서로 상승 작용하며 분노 폭발과 폭력을 낳았다.
상대에 대해 평가, 비난하는 생각, 자신에 대해 판단하는 마음이 쌓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의 괴로운 감정에 밀어내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를 알아차리는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이 바로 호흡을 가다듬고 어떻게 행동하는 게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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