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에 몽클 패딩 입고 가도 될까요?” 최근 맘카페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 같은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코미디언 이수지가 이달 초 올린 유튜브 영상의 여파다. 10분 분량의 이 영상은 사교육 1번지 강남 대치동에서 ‘도치맘’(자녀 교육에 열성을 쏟는 엄마를 부르는 말)으로 살아가는 제이미 엄마 이소담(이수지) 씨의 별난 하루를 쫓는 휴먼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영상에서 그가 입고 나온 의상은 강남 엄마들의 ‘교복’으로 통하는 390만원대 고가 몽클레르 패딩이다.
‘대치맘 패딩’ 몽클레르부터 과거 ‘등골 브레이커’ 노스페이스까지, 패션은 그저 ‘옷’을 넘어 계층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쓰이곤 한다. 이수지의 영상은 극성스러운 양육과 교육열을 희화화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성급한 일반화와 도 넘은 조롱이라며 불쾌감을 표현하는 이들도 적잖다. 강남권 학부모를 중심으로 몽클레르 패딩을 중고 시장에 내놓는 현상도 벌어졌다. 특정 브랜드의 이미지 변질이 소비자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한 사례다.
‘언더아머 단속반’과 ‘노스페이스 계급도’
과거에도 특정 브랜드가 집단 내 ‘암묵적 규칙’으로 떠오르면서 화제가 됐다. 2018년 헬스 커뮤니티에서는 “헬스 초보는 언더아머 입으면 안 된다”는 유머 섞인 주장이 집단적이고 구체적으로 퍼졌다. 허용 기준은 ‘3대(스쿼트·벤치프레스·데드리프트) 500’이었다. 세 가지 운동을 하면서 합쳐서 500kg 이상의 무게를 들 수 있어야만 언더아머를 입을 수 있다는 의미다.
퍼포먼스 스포츠웨어 브랜드였던 언더아머가 국내에서는 헬스 고인물(숙련자) 전용 브랜드로 인식되면서 ‘언더아머 단속반’이라는 밈(Meme)까지 생겼다. 단속반이 전국 각지의 헬스장을 돌아다니며 “3대 500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언더아머를 입을 경우 옷을 찢어버린다”는 내용의 다소 황당한 개그다. 이들은 페이스북 페이지에 정부 상징 로고를 삽입하고, ‘대한민국 언더아머 단속부’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공문서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공유했다.
결국 언더아머 본사가 이러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콘텐츠 업로드 자제를 요청하며 사태가 일단락됐다. 브랜드 이미지나 매출에 타격을 입을 거라는 우려에서다. 하지만 언더아머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헬스장 및 운동 전문 브랜드라는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됐다.
실제로 당시 애슬레저 패션이 대세가 되며 ‘예쁜 운동복’에 대한 수요가 커졌지만, 언더아머는 시류를 무시한 채 여전히 성능에만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소수 소비자층에 초점을 맞춘 게 결국 패착이 됐다. 한때 나이키의 대항마로 불렸던 언더아머의 가장 큰 몰락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해에는 ‘언더아머 단속반’을 패러디한 ‘사단법인 카본화 단속협회’의 ‘카본화 상시 단속 안내문’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달궜다. 러닝 초보가 고성능 운동화인 카본화를 신고 뛰다 걸리면 즉시 신발을 압수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유튜브 활동을 시작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마라토너 황영조가 안전을 위해 “초보면 가급적 (카본화) 신지 마라”고 언급하며 더 화제가 됐다.
비슷한 현상은 2010년대 초반, 10대들 사이서 유행한 노스페이스 패딩에서도 나타났었다. 당시 중·고등학생들에게 노스페이스 눕시 패딩은 ‘제2의 교복’으로 불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과정에서 ‘노스페이스 패딩 계급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50만~70만원대의 빨간색 패딩은 일진이나 대장 격인 학생들이 입었다. 25만원대 패딩은 ‘찌질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또래집단 내 위계가 형성되거나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한때 백화점 아웃도어 브랜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이후 학교폭력과 연결되며 브랜드 이미지가 급락하기도 했다.
패딩 하나가 ‘신분증’ 되는 사회
개그우먼 이수지는 ‘대치맘’ 패러디 영상을 둘러싼 논란 속 지난 25일 두 번째 영상을 공개했다. 몽클레르 패딩 대신 밍크 조끼를 입고 럭셔리 브랜드 고야드 가방을 들고 등장한 ‘제이미맘’이 아들의 중국어 발음을 자랑하고, ‘학원 라이딩’을 해주는 모습을 담았다.
첫 번째 영상이 공개된 후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는 몽클레르 패딩 매물이 급증했다. 중고나라에 따르면 지난 4일부터 25일까지 22일간 매물로 올라온 몽클레어 의류는 1190여개다. 영상 공개 전 2주간(270여건)보다 4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후속 영상 공개 이후 “당근이 밍크와 고야드백으로 넘쳐나는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일고 있다. 고야드의 가방 중 크기가 큰 쇼퍼백인 ‘생루이백’은 아기용품을 넣는 ‘기저귀 가방’으로도 유명하다. 이수지가 든 가방은 크기가 작은 토트백인 ‘앙주 백 미니’로 460만원에 판매된다. 일각에서는 “이맘때쯤 겨울 한 철 잘 입고 나서 정리에 나서는 사람들도 많다”며 “이수지 패러디와 몽클레어 패딩 매물 증가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우려 섞인 의견은 이뿐 아니다. 서울에서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황모(41)씨는 “영상에서처럼 우스꽝스럽도록 극단적인 부모들은 극히 일부다. 대부분은 나름대로 엄마의 역할에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이라며 “왜 엄마가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디자인이나 기능 때문에 브랜드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원치 않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제이미맘’ 연기를 웃고 넘기는 코미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특정 명품 아이템이나 ‘대치동 엄마’ 조롱에 열을 올리는 일부 네티즌들이 코미디를 완성한다는 반응도 나온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반응은 뜨겁다. 첫 번째 영상은 27일 오후 2시 기준 조회 수 730만회를 넘겼고, 두 번째 영상은 이틀 만에 300만 조회 수를 돌파하며 엄청난 반응을 얻고 있다.
“옷은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
브랜드가 한정된 상징으로 굳어지고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스타일을 찾기보다 유행을 따르는 경향이 뚜렷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7년 롱패딩 열풍과 과거 3초에 한 번씩 보여 ‘3초백’으로 불렸던 루이비통 가방 등 특정 브랜드와 스타일은 유행을 선도하고 빠르게 소비되는 현상을 보였다. 매스컴뿐 아니라 알고리즘 기반의 SNS 광고의 자극에 불필요한 수요가 촉진되기도 한다.
패션업계는 이러한 트렌드를 선도하기 위해 다양한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 떠오른 ‘코어(core)’ 스타일이 대표적인 예다. 영화 ‘바비’의 인기로 바비코어가, 빈티지 스타일의 부활로 빈티지코어가 각광받으며 사람들은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다양한 스타일의 등장을 패션산업의 상술로만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는 것”이라며 “‘몰개성’ 속에서도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