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 5일 조선화교배척사건 90주년 국제학술회의

Է:2021-08-04 16:20
:2021-08-0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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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간 혐오와 갈등 분출 시기 두 사건 시사점 공유 필요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는 5일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6시10분까지 만보산사건‧조선화교배척사건90주년 비대면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올해는 만보산사건 및 조선화교배척사건 9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두 사건은 1930년대 만주사변, 제1차 상해사변, 만주국 건국, 그리고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격변에 주요한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다.

특히 조선화교배척사건은 조선화교의 사회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만보산사건 및 조선화교배척사건은 같은 시기에 연속적으로 발생한 사건인 만큼 두 사건의 상호 연관성뿐 아니라 따로 분리해서 분석할 필요도 있다.

일본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베트남의 하이퐁화교배척사건 등과도 비교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었는데도 이런 종합적 검토가 국내외에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 국제세미나는 의미가 크다.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는 두 사건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관련 전문가인 “가와시마 신” 일본 도쿄대 교수를 비롯한 20여 명을 한자리에 초청해 국제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학술회의는 세계적으로 인종 및 민족 간 혐오와 갈등이 분출되고 있는 때에 개최되는 만큼, 90년 전 발생한 두 사건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우리가 직면한 현재의 문제와 씨름하는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 전문가들이 한자리에서 학술적 토론을 하면서 민족간 갈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며 갈등을 넘어선 만남을 모색한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와시마 신 일본 도쿄대 교수는 중화민국난징정부 외교부의 공문서를 활용해 중화민국정부와 일본정부가 만보산사건과 조선화교배척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려 했는지에 대해 발표한다.

일본측은 만보산사건에 대한 중국측의 책임과 배상, 중국측은 조선화교배척사건에 대한 가해자 처벌과 배상을 각각 요구한 바 있다.

양국 간의 외교 교섭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결렬됐다고 이 글은 주장한다.

이명종 강릉원주대 교수는 재만조선인 구축문제의 원인이 일본의 만몽 침탈 정책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만보산사건을 비롯한 재만조선인 구축문제 해결 과정에서 조선인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됐기 때문이다.

강진아 한양대 교수는 이주 혐오와 폭동의 보편적 문제 선상에서 조선화교배척사건을 재조명할 것을 제안한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혐오 문제와 폭력 문제를 분리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어떻게 ‘혐오’를 제어할지, 어떻게 ‘폭력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지 90년 전의 역사 속에서 배워 지금의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병욱 고려대 교수는 조선화교배척사건의 분석에 있어서, 도시 민중의 시위 방식인 ‘군중’의 역사 속에서 배화폭동을 자리매김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김주용 원광대 교수에 따르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선화교배척사건에 직면하여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고, 이때 화교배척사건의 원인이 일본제국주의에 있었다.

김 교수는 이 사건의 배경은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하려는 의도에서 일으킨 것이라 주장한다.

니시자키 마사오 박사(일본 호센카 이사)는 1982년 대학생 시절 이 사건을 안 것을 계기로 40년째 이 문제 조사와 피해자 추도 활동 등을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일본 내무성 경무국장이 각 공공기관에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자(조선인)가 있다.”는 전보를 보냈다. 이 유언비어가 일본인 자경단을 조직하게 하고 학살을 자행하게 했다.

일본정부가 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자 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학살당한 중국인은 중국 정부의 조사로 667명의 명부가 작성되었지만, 조선은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일본의 우익은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흔적은 없으며, 있었던 것은 조선인의 테러 행위에 대한 자경단 측의 정당방위에 의한 사망자뿐이라고 날조하고 있다. 또한 일본 각 지역의 공적인 장소에서 실시되던 조선인 피해자 추도 활동에 대한 공격도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화교전문가인 이정희 인천대 교수는 1927년 8월 베트남 하이퐁에서 발생한 베트남인에 의한 화교배척사건과 조선화교배척사건의 비교를 시도한다.

두 사건의 공통 원인으로 1920년대 화교 인구가 급증하여 노동현장에서 화교와 조선인‧베트남인 노동자 간의 마찰과 충돌이 증가한 점을 주목한다. 화교의 상업부문을 중심으로 한 경제력이 조선인‧베트남인을 위협하고 있었다는 점, 프랑스와 일본이 초기 진압에서 안일하게 대처한 점 그리고 안정된 식민지 통치를 위해 양국민을 서로 이간하려는 의도 등이 작용했다는 점 등을 제시한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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