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2년 영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땅바닥에 입을 맞춘 것처럼 나도 지난해 3월 16일 폐쇄 이후 처음으로 공연을 재개한 세인트 마틴 극장 앞 도로에 키스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연극과 뮤지컬 리뷰를 담당하고 있는 평론가 도미니크 카벤디시는 지난 17일(현지시간) ‘쥐덫이 어두웠던 14개월 이후 웨스트엔드에 생명을 불어넣는 길을 이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전날 연극 ‘쥐덫’에 대한 감격 어린 관극 소감을 쏟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런던 웨스트엔드가 지난해 3월 16일 발표된 영국 정부의 코로나 대응 지침에 따라 셧다운 된 지 꼬박 14개월 만에 문을 열고 라이브 공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웨스트엔드는 ‘쥐덫’을 시작으로 뮤지컬 ‘제이미’와 ‘식스’가 각각 20일과 21일 돌아오는 등 연일 공연 재개가 이뤄지고 있다. 7월까지 이어지는 공연 재개와 관련해 지금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적용해 객석의 50% 이하로 티켓을 팔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이 좋아지면 판매 좌석을 더 늘려갈 계획이다. 그리고 웨스트엔드와 함께 세계 공연계의 양대 산맥인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도 9월 14일부터 재개를 선언하고 지난 7일부터 예매를 시작했다. 다만 뮤지컬 ‘하데스 타운’이 9월 2일 재개를 앞당기기로 함에 따라 정상화 일정이 빨라졌다.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가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은 영국과 미국에서 백신 접종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19 백신을 한 차례 맞았으며, 미국은 코로나19 백신을 완전히 접종한 성인의 비율이 50%, 한 차례 이상은 60%를 넘겼다. 다만 영국에서 변이 바이러스 확산 지역에 부분 봉쇄에 해당하는 방역 지침을 다시 내리는 등 공연장의 완전한 재개까지 코로나19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극장 정상화 위해 꾸준히 실험한 웨스트엔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영국 공연계는 거리두기 좌석제 등을 실험하며 극장 정상화의 가능성을 영국 정부에 타진해 왔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캣츠’ 등의 낸 작곡가이자 극장주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지난해 7월 런던 팔라디움 극장에서 마스크 착용, 체온 측정, 극장 소독 등 한국의 공연장 방역을 벤치마킹 하고 객석 띄어 앉기를 적용해 공연을 올린 실험은 대표적이다.
또 지난해 여름 코로나19가 잠시 주춤해지자 런던의 로열 오페라하우스(코벤트가든)와 국립극장(NT) 등은 10월 조심스럽게 소규모 공연으로 극장 문을 열었다. 로열발레단은 전막 발레 대신 갈라 공연을 10월 9일과 17일 두 차례 선보였으며, NT는 10월 21일 1인극 ‘잉글랜드의 죽음: 델로이’를 올리비에 극장 무대에 올렸다. 사회적 거리두기(2m)를 도입한 NT는 1150석 규모인 올리비에 극장을 회차당 500명 미만의 관객만 허락한 대신 동행 3~4명이 함께 앉는 유연함을 발휘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영국 정부가 지난해 11월 5일 재봉쇄를 선언함에 따라 애초 11월 28일까지였던 ‘잉글랜드의 죽음: 델로이’는 바로 막을 내려야 했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머시브 연극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 10월 22일 문을 열었다가 11월 4일 막을 내렸지만 12월 2일 또다시 관객을 받기 위해 문을 열었다.
코로나 시기에 웨스트엔드에서 문을 연 공연들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재개관의 가늠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무엇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공연장에 적용해서는 공연계가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 줬기 때문이다. 로이드 웨버가 의회에 직접 출석해 이 문제를 설명하는가 하면 극장 및 제작사 관계자들은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영국 공연계는 지난 1년여간의 사례를 바탕으로 극장 재개관을 준비하는 한편 정부가 주체인 코로나 관련 보험의 도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공연 재개와 함께 함께 불거진 논란들
웨스트엔드의 거물인 작곡가 로이드 웨버와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는 ‘오페라의 유령’을 7월 27일 재개한다고 발표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축소를 밝혔다. 27명이던 단원이 14명으로 축소된다.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낼 수 있는 전자 키보드가 오보에 하프 트럼펫 퍼커션 등의 역할을 대신할 예정이다. 코로나가 초래한 공연계 위기에 제작비 축소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된 셈이다. 연주자들은 반발했지만, 제작사의 입장은 단호하다. 사람들의 수입이 줄고 관광객이 못 오는 상황에서 티켓 판매가 예전 수준으로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웨스트엔드는 지금까지 티켓 매출만 약 10억 파운드(1조6000억 원)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웨스트엔드에서 ‘오페라의 유령’ 외에 아직 오케스트라 규모 축소를 언급한 프로덕션은 없지만, 방향성 면에서 비슷한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오페라의 유령’의 오케스트라 축소와 함께 논란이 된 것은 인터미션, 즉 중간휴식의 폐지다.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 등이 공연 재개를 앞두고 위생 규칙을 강화하고 나섰는데, 공연 시간을 줄이고 관객의 불필요한 이동을 막기 위한 인터미션 폐지가 포함됐다. 인터미션을 없애면 극장 로비에서 관객들이 음료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없앰으로써 비말에 의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 위험성을 줄일 수 있다. 식음료 판매 중단은 공연장 수익에 큰 타격을 주지만 포기한 것이다.
한마디로 공연만 보고 가라는 극장 측의 입장에 애호가들은 반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극장이 그저 공연 관람 공간만이 아니라 사교 활동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영국에 앞서 독일 등에서도 최근 공연장에서 식음료 판매를 중단함으로써 인터미션 때 관객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추세다.

브로드웨이 재개는 뉴욕의 일상 복귀 상징
미국 뉴욕주가 코로나19 방역 조치를 완화하면서 뉴욕 브로드웨이도 9월 14일부터 공연이 재개된다. 지난해 3월 12일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봉쇄조치의 일환으로 공연이 중단된 지 18개월 만이다. 게다가 거리두기 없이 좌석의 100%를 팔 수 있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19일부터 식당과 체육관 등 각종 매장의 영업 규제가 폐지된다고 발표했다. 뮤지컬의 경우 공연 리허설과 작품 마케팅 등에 시간이 필요한 만큼 4개월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됐다. 올해 안에 약 30개의 뮤지컬이 공연을 재개하는데, 이중 절반이 9월부터 열린다. 특히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라이온킹’ ‘해밀턴’ ‘위키드’ 등이 9월 14일 막을 올린다. 당초 이들 세 작품이 가장 먼저 재개될 예정이었지만 ‘하데스타운’이 25일 9월 2일 가장 먼저 공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순서가 바뀌게 됐다.

쿠오모 주지사는 “브로드웨이 극장들이 백신을 맞은 관객들만 입장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하지만 주 정부가 이를 강제할 수는 없다”면서도 “9월이 아직 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뉴욕시는 주요 관광지와 지하철역 등에서 백신 무료 접종소를 운영, 경제 정상화를 꾀하고 있다. 브로드웨이 프로듀서와 극장 협회인 브로드웨이 리그는 마스크 착용, 백신 접종 의무화 등에 대한 방역 지침을 논의 중이다.
미국 문화산업의 한 축인 브로드웨이는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기 전인 2019년만 해도 41개 극장이 1460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여 18억 달러(약 2조 원)에 달하는 입장권 수익을 거뒀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지난 3월까지 아예 실내에서 라이브 공연을 올리지 못했다. 뉴욕 주 정부가 지난 4월 초부터 정원 대비 33%, 100명 이하의 관객을 받는 조건으로 실내 공연장 개관을 허가했지만 이런 인원 제한으로는 수지를 맞출 수 없는 중대형 극장은 여전히 문을 닫은 채였다. 대극장의 경우 지난달 3일 세인트 제임스 극장에서 ‘브로드웨이의 거물’ 배우 네이단 레인과 무용수 사비옹 글로버가 공연계 의료복지기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36분간의 이벤트 공연이 유일했다.
브로드웨이의 재개에 5만 명 넘는 배우들이 속한 배우노조를 비롯해 공연계는 뉴욕주의 조치를 환영하고 있다. 다만 ‘하데스’처럼 재개를 앞당긴 낙관적 사례가 나오는 중에도 적지 않은 극장과 제작사는 공연 재개 여부와 시기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관객이 극장에 돌아올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브로드웨이 극장가의 절반 가까이 채웠던 관광객의 유입이 여전히 불확실한 데다 객석의 100%를 채우는 것이 관객에게 되레 감염에 대한 우려를 줄 수 있어서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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