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를 둘러싸고 ‘롤러코스터’ 같은 국면 전환이 거듭되고 있다. 판문점 선언 이후 순항하던 남북관계와 북미정상회담 준비는 지난주 ‘김계관 담화’로 갑작스러운 경색 국면에 진입했다. 북한의 ‘돌변’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한국과 미국을 향한 비판은 거칠었다. 북미정상회담을 ‘재고려’하겠다고까지 했다.
김계관 담화가 발표된 지 꼭 엿새 만인 22일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현장을 취재할 남측 기자단 명단을 접수했다. 줄곧 명단 접수를 거부하더니 23일부터 진행될 폐기식을 하루 앞두고 막판에 태도를 바꿨다. 베이징으로 출국했던 취재진은 남북 직항로를 이용해 원산으로 가서 베이징~원산 항로를 이용한 외신기자들과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남측 취재진 명단접수는 한미정상회담이 끝난 지 몇 시간 만에 이뤄졌다. 북미정상회담을 조율하고 중재하는 자리였던 이 회담의 결과가 북한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미정상회담 역시 돌발적인 상황과 예상 밖의 발언이 속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 1월 북미회담의 연기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회담 후 두 정상은 북미회담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기” 발언에 북한이 ‘남측 취재진 허용’이란 우호적 제스처를 취한 것인지,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6·12 성공 노력” 합의에 그렇게 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북한은 6일간 한껏도 얼어붙어 있던 한반도 해빙 무드에 다시 불씨를 댕겼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역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 국면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北의 돌변, 결국 ‘줄다리기’였나
해빙 무드가 경색 국면으로 바뀐 신호탄은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지난 16일 담화였다. 그는 맥스선더 한미연합훈련과 존 볼턴 백악관 보좌관의 리비아식 핵폐기 발언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북미정상회담 무산 가능성을 제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부 인사들이 어리둥절해 할 만큼 갑작스런 변화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 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도 했다.
하지만 이 담화가 ‘회담 파기 수순’은 아니라는 정황 역시 여러 대목에서 발견됐다. 북한은 김계관 담화를 주민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대외용’으로만 발표하고 내부에는 북미 대화에 이상기류가 만들어졌다는 걸 알리지 않은 것이다. 실제 대화의 장을 떠날 뜻이 있었다면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는 조치였다. 이미 북미정상회담 계획을 주민들에게 공개한 터라 회담이 무산될 경우 명분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알렸어야 했는데, 북한은 그러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김계관 담화를 분석하며 “베테랑 외교관을 동원해 수위조절을 했다”고 평가했다. 담화문은 1700자가 넘을 만큼 긴 글이었다. 이를 회담 파기 수순으로 보기엔 어색한 대목이 많았다. 너무 구체적이다. ‘리비아식 핵폐기’를 언급하며 “우리는 처참한 말로를 겪은 리비아와 다르다”고 강조했고,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콕 집어 거론하며 “그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이 문장이 분석의 단초를 제공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기간 조미대화가 진행될 때마다 볼턴과 같은 자들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던 과거사를 망각하고 리비아 핵포기 방식이요 뭐요 하는 사이비 우국지사들의 말을 따른다면, 앞으로 조미수뇌회담을 비롯한 전반적인 조미관계 전망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명백하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볼턴의 방식을 택하지 말라”고 촉구하는 내용이다. 담화문의 마지막 단락과 맥이 닿아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조미관계 개선을 위한 진정성을 가지고 조미수뇌회담에 나오는 경우 우리의 응당한 호응을 받게 될 것이지만,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 가 일방적인 핵포기만을 강요하려든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화에 더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면서 ‘북미관계 개선의 진정성’을 주문했다.

◆ 평양 이어 워싱턴도 돌발상황… 폼페이오의 진화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 연기 가능성” 발언은 한·미 정상회담 도중 예정에 없던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모두 발언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도 좋고 안 열려도 좋다”고 말하자 풀(POOL) 취재에 들어갔던 기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트럼프는 ‘회담 연기’를 언급했다. 통상 정상회담은 모두발언만 공개하고 기자단이 퇴장하는 게 관례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작정한 듯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이어갔다.
한·미 정상회담은 22일 정오 무렵(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단독회담으로 시작됐다.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모두 발언이 끝난 직후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모두발언에서 “싱가포르 회담이 열릴지 안 열릴지는 두고 봐야 될 것”이라며 “그것이 열린다면 아주 좋은 일이 될 것이고, 북한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도 괜찮다”고 말한 데 따른 것이다.
질문이 나오자 트럼프 대통령은 “6월 중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되지 않을 커다란 가능성이 있다” “북·미 정상회담 준비를 하고 있지만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 “지금 열리지 않더라도 나중에 열릴 수도 있다”는 등의 발언을 내놓았다.
그가 북미정상회담에 부정적인 발언만 한 것은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한국과 중국, 일본도 자금을 투자하고 싶어 한다” “(비핵화 합의 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비핵화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이런 발언이 언론에 보도된 뒤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국무부 브리핑룸을 찾았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는 “백악관과 국무부는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예정된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준비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기 가능성 언급이 나오자 확대 해석을 차단하려는 듯했다.
폼에이오 장관은 북한의 비핵화와 더 이상 세계를 위협하지 않는 조건 조성을 목표로 하는 정상회담을 "충분히(fully)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그는 특히 "나는 김정은 위원장과 했던 대화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며 "그 얘기들은 그와 나 사이에 있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국민들을 위해 미국인들의 투자, 미국인들의 기술, 미국인들의 노하우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그가 발견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또 "그와 나는 일반적인 것에 대해 얘기할 기회를 가졌다"며 "우리가 비핵화를 얻으면 미국은 북한 주민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많은 것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北의 막판 반전… 풍계리 폐기, 예정대로 진행될 듯
북한은 23일 오전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참관할 국내 취재진 명단을 접수했다. 통일부는 “판문점 개시 통화 때 북측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현장을 방문해 취재할 우리 측 2개 언론사(MBC, 뉴스1) 기자 8명의 명단을 북측에 통보했고, 북측은 이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앞서 미국과 영국, 러시아, 중국 등 4개국 외신기자단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행사 취재를 위해 22일 베이징에서 고려항공 전세기를 통해 원산으로 들어갔다. 남측 취재진 8명도 베이징에서 판문점 채널을 통한 남북 협의 과정을 지켜보며 공항에서 대기했지만, 이동이 무산되자 귀국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남측 스키선수 등 우리 대표단은 지난 1월 31일 남북 공동훈련을 위해 양양공항에서 전세기로 원산 갈마비행장으로 이동 한 바 있다. 통일부 역시 평창올림픽 전례에 따라 남측 취재단이 남북 직항로를 이용해 원산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북측을 방문할 기자단에 대한 방북 승인 및 수송지원 등 필요 조치를 조속히 취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는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가 당초 공언한 대로 진행될 것임을 말해준다. 한국 미국 중국 영국 러시아 등 5개국 취재진이 참관한 가운데 23~25일 실시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이를 ‘긍정적 신호’로 평가해 왔다. 청와대도 “미래의 핵실험을 차단하는 조치”라며 환영했었다. ‘인질 석방’에 이어 한미 양국이 해빙무드 순항의 근거로 삼는 ‘풍계리 폐기’가 실행되면 북미정상회담에도 호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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