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35일. 그레고리력에 존재하지 않는 이 날짜는 중국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천안문 사건을 검색하는 키워드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모인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했던 천안문 사건의 발발일, 1989년 6월 4일을 뜻한다. ‘5월 31일에서 나흘 뒤’라는 의미다. 중국에서 천안문 사건을 기억하거나 정부의 검열을 피해 관련 문헌을 탐색하는 사람들이 ‘5월 35일’이라는 은어를 만들었다.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민주화와 자유화를 외치는 숭고한 정신. 201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는 이 정신을 지탱한 중국 민주화의 상징이자 기둥이었다.

1. 천안문 사건은 무엇인가
세 번의 천안문 사건이 있었다. 1차 사건은 일제와 서구열강의 강화조약에 반발했던 1919년 5월 4일, 2차 사건은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의 퇴진을 요구했던 1976년 4월 5일, 3차 사건은 민주화와 자유화를 외쳤던 1989년 6월 4일에 각각 발생했다. 시민운동을 유혈 진압한 가해자는 1차 사건에서 베이징 지방정부 군‧경, 2차 사건부터 인민해방군이었다.
1차 사건은 중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하고 일제를 몰아내면서, 2차 사건은 마오이즘(마오쩌둥식 공산주의)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모두 시민운동으로 인정받았다. 지금은 중국 안에서 각각 ‘5‧4운동’ ‘4‧5혁명’으로도 불린다. 반면 3차 사건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태도는 다르다. 공산당 일당체제를 거부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요구했던 시민을 정부와 공산주의 편향 여론은 ‘폭도’ 또는 ‘반정부주의자’로 몰아갔다. 천안문 사건은 보편적으로 3차 사건을 가리킨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의 사망은 대학생 노동자 시민을 천안문광장으로 모았다. 후야오방은 마오이즘과 문화대혁명을 비판했던 사실상 반정부 인사였다. 베이징의 대학생들은 그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세계화에 역행하는 체제와 공산당 관리의 부패를 비판했다. 노동자와 시민이 가세하면서 100만명이 천안문광장에 모였다.
중국 정부는 그해 6월 4일 인민해방군을 투입해 진압을 시작했다. 그렇게 천안문 사건이 발발했다. 보병과 탱크 앞에서 시민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천안문 사건을 상징하는 탱크 앞의 남자, 지금도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왕웨이린의 사진은 그때 촬영됐다.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집계는 정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민간인 875명, 군‧경 56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실제 사망자는 2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 ‘천안문 사군자’ 류샤오보
류샤오보는 천안문 사건 전까지 중국에서 촉망받은 지식인이었다. 베이징 사범대에서 중문학 석사, 문예창작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해외를 다니며 연구와 강연 활동을 했던 작가이자 학자였다. 그는 미국에 있던 1989년 천안문광장의 민중항쟁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귀국했다. 시민과 함께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류샤오보는 시민 측 지식인 대표의 일원으로 정부와 협상하며 평화적 해결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총을 부수는 퍼포먼스로 조금씩 광장을 향해 다가오는 폭력에 저항했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노력은 인민해방군의 투입으로 무산됐다.
류샤오보는 천안문 사건 발생 이틀 뒤인 그해 6월 6일 공안에 반혁명선전선동 혐의로 체포됐다. 그 이후 민중항쟁 주동자는 대부분 해외로 망명을 떠났다. 하지만 류샤오보는 남았다. 천안문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단식투쟁을 벌이는가 하면, 반정부 서적을 펴내며 민주화운동을 이어갔다.
류샤오보는 민주화운동을 함께 전개한 허우더젠, 가오신, 저우둬와 함께 ‘천안문 사군자’(天安門 四君子)로 불렸다. 당연히 중국 정부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들였다. 류샤오보는 1996년 천안문 사건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노동개조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09년에는 교수 법조인 언론인 등 지식인 303명과 공산당 일당체제 철폐를 요구한 ‘08헌장’에 서명해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국가전복 선동이었다. 그는 이후 랴오닝성 진저우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3. 오직 조국만 인정하지 않는 노벨 평화상
노벨위원회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인권운동을 전개한 류샤오보를 2010년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시상식은 그해 12월 10일. 하지만 류샤오보는 진저우 교도소에 있었다. 국제사회와 인권단체들은 류샤오보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중국 정부는 거부했다. 노벨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며 항의했다. 류샤오보는 세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훈장으로 여겨지는 노벨 평화상을 직접 받을 수 없었다. 시상식 참석은 결국 불발됐다.
류샤오보의 노벨 평화상은 마치 ‘5월 35일’처럼 중국 정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의 견제는 상상 이상이었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이라크 쿠바 모로코 등 주요 동맹국을 압박해 그해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자를 보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류샤오보 가족의 출국까지 막았다. 이로 인해 대리 수상은 불발됐다. 노벨위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빈 의자에 평화상 메달을 올려놨다. 시상식 참석자는 전원 기립해 3분 동안 박수를 치며 류샤오보의 정신을 기렸다.
류샤오보는 지난 5월 간암 말기를 진단받았다. 지난달 26일 가석방돼 중국 의과대학 부속 제1병원에 입원했다. 허약해진 몸으로 병상에 누워 죽음만 기다리던 지난 13일 밤. 류샤오보는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 중국의 민주화와 자유화를 위해 한평생을 헌신한 류샤오보의 죽음에 유엔과 미국·프랑스 정부 등 국제사회는 일제히 성명을 내고 애도했다.
국민일보 더피플피디아: 류샤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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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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