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린 빈곤정책 (하)] “주민센터 갈 때마다 구걸하러 가는 느낌에 모멸감”

(하) 복지는 ‘시혜’ 아닌 최소한의 ‘권리’

“주민센터에 갈 때마다 구걸하러 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그 나이에 일을 하지 않느냐는 비난 섞인 눈빛, 거짓말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 그래서 주민센터에 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기초생활수급자인 이상진(가명·24)씨는 아버지와 동생이 장애인이라 오랫동안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어릴 때는 불쌍한 아이 취급을 받았고 성인이 된 뒤에는 모욕감을 참아내야 했다. ‘일해서 돈 벌 생각은 않고 피 같은 세금에서 최저생계비나 구걸해 가는 인생.’ 이씨가 받은 이 무언의 힐난은 과연 합당한 것일까.

국민기초생활보장법(기초법)에 따르면 이씨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최소한으로 보장받고 있다. 염치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씨네 세 식구를 포함해 134만명 기초생활수급자 모두 국가의 ‘시혜’를 받는 게 최소한의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초생활보장이 국민의 권리라는 인식은 미약하다. 정부부터 시혜로 접근하고 수급자들은 ‘미안하게도 민폐 끼치며’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정부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 송파구 세 모녀의 마지막 말도 ‘죄송합니다’였다. 누구나 가난해질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정서는 세금으로 가난한 이들 생계비 주는 일에 싸늘한 편이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정부의 접근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물가상승률도 따라가지 못하는 빈곤층 복지예산 증가율, 까다로운 수급자격 조건, 부정 수급 색출에 기울이는 노력 등을 보면 정부가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화여대 정익중 교수(사회복지학)는 “기초생활보장은 생존의 권리여서 국가가 보장하는 게 맞는데 (정부는) 시혜라고 여긴다”며 “수급 자격을 아주 까다롭게 설정한 점이나 수급권 유지를 어렵게 만들어놓은 것만 봐도 정부가 이 복지 시스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수급자 발굴보다 부정수급자 색출 성과가 높은 것도 시혜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결과다. 최근 인천에서는 장애인 활동 지원사업의 부정수급 실태를 수사하겠다며 경찰이 장애인 등 1000여명의 개인정보를 무차별 수집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주민센터에서 모멸감을 느꼈던 이씨는 사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에 들어갔고 차비와 교재비가 필요했기 때문인데, 자기 이름으로 돈을 벌면 부양의무자 소득으로 잡혀 수급액이 깎일 처지라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려야 했다.

사회복지통합관리망(행복e음) 도입 이후 아르바이트 소득까지 낱낱이 드러나면서 이씨처럼 절박한 경우엔 편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미곤 연구위원은 “행복e음이 사각지대를 발굴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부정·과잉 수급만 자꾸 찾아낸다면 ‘행복e음’이 아니라 ‘불행e음’”이라고 말했다.

정해진 예산에 끼워 맞춰 수급자 범위를 정하다 보니 수급액 수준도 형편없다. 정익중 교수는 “수급자들이 스스로를 창피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액수”라며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돼야 정부가 개입하면서도 노동 동기 약화를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급자들에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 최저생계비로 지급되는 데 대한 지적이다.

국민 정서도 중요하다. 국회에서 법을 만들고 정부가 법을 집행할 때 국민정서를 무시할 수 없다. 수급자의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할 때 300만원짜리 자동차는 소득 300만원으로 계산된다. 이렇게 소득이 잡히면 수급액은 줄어든다. 전문가들은 이 계산이 매우 비현실적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어디 차를 몰고 다니냐’는 사회 분위기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한동대 정숙희 교수(사회복지학)는 “1999년 제정된 기초법의 취지는 복지가 권리라는 인식을 강화한 것인데 인식 개선은 함께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가 빈곤층을 지켜내야 한다는 데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지만 내가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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