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강대국과 신뢰 구축… ‘초강대국 통일 독일’ 우려 불식

Է:2013-06-30 18:53
:2013-06-30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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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강대국과 신뢰 구축… ‘초강대국 통일 독일’ 우려 불식

독일 통일을 가능케한 대외 정책들

베를린 장벽 붕괴 3일 뒤인 1989년 11월 12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의 집무실에 한 장의 팩스가 도착했다. 팩스를 받아 든 콜 총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날 발행된 영국 선데이타임스의 기사였다.

“통일 독일은 유럽의 경제 초강대국인 제4독일제국이 될 것이다. 영국이 설 땅은 어느 곳인가?” 통일 독일을 히틀러의 제3제국에 이은 또 다른 위협 요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프랑스의 시각은 더 어두웠다. 르몽드는 이렇게 분석했다. “독일의 뜨거운 통일은 유럽의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유럽공동체의 통합 계획은 뒤죽박죽이 되고 서독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다시 3일 뒤 소련 모스크바.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대학생들 앞에 섰다. “독일의 인위적인 통일에 반대한다. 두 개의 독일이 서로 대립하지 않으면서 존립할 것으로 믿는다.”

이듬해 2월 24일. 미국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콜 총리와 만난 아버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통일 독일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유럽공동체(EC·유럽연합 전신)에 머물러야 한다.”

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에서는 연일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지만, 통일을 바라는 국가는 독일밖에 없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찬성이었지만 통일된 독일이 중립국으로 남지 않을까 내심 불안해했다.

“독일 국민 대다수에게 ‘독일 문제’는 독일의 과제(German Question), 즉 독일 민족이 어떻게 하나로 합칠 것이냐를 의미하지만, 이웃 국가에는 독일이라는 골칫덩어리(German Problem), 즉 어떻게 하면 독일 분단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미”라는 독일의 정치전문지 ‘다스 팔라멘트’의 유명한 분석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2차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통일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승전국인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는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독일 연방의 분리와 해체를 기획했다. 통일 결정권은 4개국에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서독에는 미국과 소련 등의 군사 100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핵무기도 배치됐다. 갑작스런 사태의 진전은 강대국들의 불안을 더 키웠다. 소련 주재 미국 대사를 역임한 조지 캐넌은 베를린 장벽 붕괴를 보면서 “포괄적인 국제적 틀에 제약받지 않는 독일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선 안 된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미·소·영·프는 90년 9월 12일 동·서독 분할 점령권을 포기하는 2+4 조약을 체결했다. 통일 결정권을 서독과 동독에 넘겨준 것이다. 4년 뒤(94년 9월 8일)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서방연합군이 철수했다. 앞서 러시아 주둔군의 철수와 함께 완전한 통일을 이뤄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통일연구원 여인곤 선임연구원은 ‘통일 독일의 적극적 외교정책’ 논문에서 “통일이 가능했던 것은 서독이 주변국과 신뢰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통일의 기회가 다가왔을 때 주변 국가를 활용하고 강대국 독일의 등장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켜 통일을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다시 90년 2월 1일. 독일 투칭에서 열린 개신교아카데미 연례회의에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이 등장했다. 그는 미·소 입장을 모두 수용한 통일 방안을 제시했다. “통일 이후에도 나토에 잔류하겠지만, 나토군은 지금 있는 곳에만 머물 것이다. 옛 동독 지역에는 주둔하지 않는다.”

고르바초프가 독일 통일에 반대하는 이유가 소련 군부 내 강경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는 점을 파고들어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다. 독일은 나토가 더 이상 소련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조건 없이 30억 달러의 차관을 소련에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2주일 뒤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릴 4대 전승국과 동·서독 외무장관 회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겐셔 장관은 4+2, 즉 4대 전승국이 주도하는 점진적 통일방안 대신 동·서독이 주도하는 2+4 체제를 원했다. 이를 위해선 전승국의 불안을 불식시켜야 했다. 겐셔는 이렇게 말했다.

“현실 정치는 동서 진영 간 힘의 균형에 변화를 가져오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안보적 관심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 다른 나라에 반하는 안보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 함께하는 안보가 중요하다.”

콜 총리와 겐셔 장관의 신속한 대응이 결과적으로 통일을 이뤄냈다. 사실 미·영은 독일 통일을 정면으로 반대했다기보다 점진적 추진을 원했다. 통일의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자신들의 영향권 내에 두고 싶어했던 것이다.

독일 내 지식인과 대부분의 정치세력도 비슷했다. 갑작스러운 것보다 단계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갑자기 무너진 것을 목격한 콜 총리와 겐셔 장관은 신속한 통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콜 총리는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과 만나 영국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EC 통합, 즉 유럽연합(EU) 탄생에 적극 기여하겠다고 제안했다. 또 미테랑 프랑스 총리와 만나 마르크화를 포기하고 유럽 공통화폐 체계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두 나라의 숙원을 들어주면서 통일에 대한 지지를 얻어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속한 통일 전략이 맞았다.

독일 외무부는 “비스마르크 시대의 통일 독일과 지금의 독일에는 큰 차이가 있다”며 “군국주의 관료주의 국가였던 비스마르크 제국과 두 번째 민족 국가는 단절됐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주변국 지지를 얻어내고 융합하는 외교 노선이 제2의 통일을 이뤄낸 것이다.

민족통일연구원 손기웅 책임연구원은 “다차원적으로 전개된 서독의 외교력이 통일을 앞당겼다”며 “우리도 통일 한국의 군사안보적 위치를 어떻게 설정해야 미·중·일·러 주변 4개국이 한반도 통일을 지지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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