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금 여행가방을 싼다… 여행업계 2년만에 ‘대박’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심각했다.”
여행업계 사람들은 지난해를 이렇게 회상한다. ‘동반자 100만원 할인’ ‘최저가 보장’…. 눈이 번쩍 뜨이겠지 하는 문구도 통하지 않았다. 여행사 대리점에는 전화 벨소리가 거의 울리지 않았다.
일이 없으니 직원들도 쉬었다. 남들 휴가 갈 때 발바닥 땀나게 일해야 할 모두투어 여행사 직원들은 지난해 1월부터 석 달에 한 달씩 돌아가며 무급 휴직에 들어갔다.
이진수(37) 유럽사업부 차장도 그랬다. 협력업체와 회의가 끝나면 대리점과 치열한 회의가 이어졌다. 이슈는 늘 같았다. ‘어떻게 하면 여행객을 모을까.’
“너무 싸게 팔아서 눈물나지 않았냐고요? 전혀요. 싸게 팔아도 손님이 안 오는 게 진짜 피눈물 나는 겁니다. 해결책이 전혀 안 보이는 거잖아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지난해 신종 플루로 여행업계는 완전히 숨이 죽었다. 이 차장은 “가장 무서운 게 질병, 특히 신종 플루”라고 말했다. 2003년 중국과 홍콩 등에서 유행했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여파도 한 달을 못 갔고, 2004년 쓰나미(지진해일)도 태국 푸껫 등에 국한된 이슈였다. 신종 플루는 고집스러울 만큼 길었고, 세계를 강타할 만큼 힘이 셌다.
그랬던 이 차장이 올해는 웃는다. 13일 서울 을지로 1가 모두투어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눈이 발갛게 충혈돼 있었다. 전날 직원들과 회식을 했단다. 그래도 입 꼬리는 하늘을 향했다. 피로한 ‘눈’과 행복한 ‘입술’은 아이러니컬하게 공존했다.
여행업계가 2년간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지난 2월, 한창 비수기일 때였다. 미처 준비 못한 여행사마다 예약이 쇄도했고 3월부터 여름 성수기를 대비한 여행사들의 비행기 좌석 확보 전쟁이 벌어졌다. 항공사들은 여행사 실적을 보고 좌석을 나눠준다. 이를 따내는 비법? 이 차장은 “일반적인 공급가보다 웃돈을 주고 좌석을 확보할 때도 있어요. 자주는 아니지만”하며 대답을 살짝 비켜간다.
모두투어는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대하고 있다. 2분기 실적은 이미 기록을 갈아 치웠다. 모처럼 대목이 찾아왔으니 여행사 직원들은 주말도 없이 야근으로 바쁘겠는데? “아니에요.” 의외의 대답이다. “여행객들이 이미 가을까지 거의 차서 마감된 상품이 많아요. 야근할 일이 별로 없어요.” 영업이 너무 잘돼 오히려 덜 바쁘다고 한다.
이 차장은 이번 주부터 성수기 집중 근무에 들어간다. 외근 자제, 휴대전화 상시 대기 등이 요구되는 시기다. “지난해가 끊임없는 비수기였다면 올해는 성수기의 연속입니다.”
여행업계 즐거운 비명
여행업계는 올해 사상 최대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 모두투어 2분기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264억원과 5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87.8%와 1818.3% 증가했다. 하나투어도 2분기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각각 480억원, 45억원으로 지난해보다 65%, 1만2500% 껑충 뛰었다.
전염병 없음, 적당하게 더운 날씨, 경기 회복. 세 조건을 두루 갖춘 데다 올해는 추석도 황금연휴다. 지난해 설 1월 26일(월), 추석 10월 3일(토), 올해 설 2월 14일(일). 직장인이라면 달력을 보면서 많이도 실망했을 터. 지난해부터 이어져온 ‘주말 낀 명절’ 행렬이 올 추석에 깨졌다. 9월 21∼23일로 화∼목요일이다. 앞뒤 월요일과 금요일에 휴가를 내면 열흘 가까이 쉴 수 있다.
모처럼 찾아온 경기 회복기 여름휴가와 추석 황금연휴, 사람들은 어디에 가려는 걸까. 여름엔 휴식형 상품이 대세다. 올해는 중국 후난성 북서부 휴양지 장자제(張家界)가 떴다. 추석 예약 현황은 단연 관광형 상품이 인기. 하나투어 이승철 팀장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찾는 이가 많다고 귀띔했다.
이렇게 해외여행을 떠나려면 비행기표가 있어야 하는데 좌석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대한항공은 밀려드는 손님을 맞기 위해 7∼8월 임시 항공편을 248회 운영한다. 지난해보다 79회 증가했다. 대한항공의 여름 성수기(7월 17일∼8월 20일) 예약률은 89%, 아시아나항공은 85%다.
여행업계는 “사람 좀 구해달라”며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유럽지역 여행객 인솔자의 경우 정규직 70명으로 부족해 프리랜서 120명을 추가 고용했다”고 전했다.
여행객 “비싸도 간다, 비행기표만 있다면”
여행사는 웃고 있지만, 요즘 여행 마니아들은 울상이다. 회사원 황모(49)씨는 추석에 11박12일의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여행을 계획했다가 포기했다. 이유는 단 하나, 가격 때문이다. “지난해 비성수기에 180만원이면 충분했는데 올해는 300만원대로 값이 뛰었다니까요. 이게 말이 됩니까?”
황씨가 예약하려던 C여행사의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11박12일 보통형 상품은 추석 때 가격이 정점에 이른다. 7∼8월엔 최고 279만원이고, 추석 시즌이 되면 339만원으로 치솟는다. 가격은 10월에야 안정을 찾는다. 199만∼209만원.
“여행사들 한탕주의예요. 지난해 불황을 올해 다 극복하려는 거죠.” 황씨는 성수기가 한참 지난 10월에 스페인으로 여행할 예정이다.
하나투어와 모두투어는 여행업계를 대표하는 대형 여행사다. 지난해와 올해 상품 가격 리스트를 부탁했다. 대답은 완곡한 거절. “상품 구성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단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계속 졸라댔다. 얼마나 인상한 것이냐? 하나투어 측은 “지난해보다 30%쯤 올랐다”고 했다. 모두투어 측은 “항공료 인상분인 10∼20% 정도”란다. “지난해 워낙 헐값에 팔았기 때문에 올해 가격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비싸도 여행객들은 떠난다. 왜? 성수기 아니면 휴가 떠나는 데 눈치 보이는 회사가 많으니까. 오랜만에 다가온 황금연휴 추석도 놓칠 수 없으니까. 서울 장안동에 사는 성모(35·여)씨도 그렇다. 9월 초에 떠날 이탈리아 여행의 항공권을 지난주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
성씨가 구입한 항공권은 유류세 포함해 왕복 177만원. “추석까진 완전 매진이에요. 여행사에 있는 지인에게 부탁해 겨우 마련했다니까요. 못 나가는 것보다는 낫죠. 국내 여행이야 주말에도 다닐 수 있지만 해외여행은 휴가철 아니면 못 가잖아요.”
해외여행객 폭발적 증가, 왜?
“보상심리예요. 지난해 신종 플루와 경기침체로 해외에 못 나간 데 대한 일종의 심리적 반사작용이죠.” 한양대 구리병원 정신과 박용천 교수는 올해 해외여행 열풍을 이렇게 분석했다.
“대인관계에 지친 사람들이 집에서 책 읽으며 휴가 보내면 성찰의 기회가 되죠. 하지만 ‘돈이 없거나 함께 여행할 사람이 없어서 이러고 있네’ 생각이 들면 우울해지죠. 봄에 햇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그런 날 있잖아요? 그런 때일수록 집에만 있으면 우울한 법이거든요. 아마 지난해 휴가를 제대로 보내지 못했던 분들이 그때 겪었던 우울함을 떨쳐내려고 더 해외로 나가려는 걸 거예요.”
여행업계 관계자들의 분석도 비슷하다. “여행이란 게 중독이잖아요. 지난해 신종 플루 때문에 참았으니까 올해는 마음껏 나가자는 심리가 강한 것 같아요. 1년간 쉬었으니 여행자금도 쌓였을 테고요.”
지난해 바캉스 키워드는 ‘스테이케이션’이었다. 스테이(stay)와 베케이션(vacation)의 합성어. 멀리 떠나지 않고 집과 도심에서 휴가를 즐기는 것이다. 경기침체는 가정 위주의 소비와 여가활동으로 이어졌다. 뒤집으면 올해 해외여행 열풍은 경기가 어느 정도 회복됐다는 얘기다. 최석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레저경영전문대학원장은 “금융위기를 극복한 중산층이 해외로 나가는 것”이라며 “최근 영업 실적이 좋은 대기업들이 직원들의 휴가 사용에 관대한 것도 이유”라고 분석했다.
No 쇼핑! No 팁! No 옵션!
부산 해운대에 거주하는 박영욱(62)씨 집에는 쓰지 않는 잡동사니가 수두룩하다. 부엌 서랍장에는 중국차(茶·2만원)가 4∼5년째 방치돼 있다. 창고에는 난이 그려진 그림(3만원), 화장대 서랍에는 건강팔찌(3만원)와 진주 목걸이(20만원), 장롱에는 라텍스 베개 2개(14만원)가 쓰일 곳을 찾지 못한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박씨가 2006년부터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에서 사 모은 것들이다. 중국차는 쓰디쓴 맛이었고, 라텍스 베개는 목이 불편했으며, 진주 목걸이를 본 아내는 오히려 구박했다. “이거 한국에서 10만원도 안 하겠는데.”
박씨는 다음달 10일 아내와 8박9일 터키 여행을 앞두고 있다. 1인당 310만원. 조금 비싸지만 괜찮다. 특급 호텔에서 편하게 쉬려고 택한 상품이다. 올해부터 여행지에서 절대로 쇼핑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노 쇼핑 상품을 선택할까 했는데 그런 것들은 일반 여행상품보다 비싸대요. 차라리 일반 상품을 선택한 뒤에 쇼핑을 안 하는 게 득일 것 같아요.”
요즘 여행객들이 대체로 이렇다. 노 팁, 노 옵션, 노 쇼핑이 대세다. 하나투어 이승철 팀장은 “여행지에서 팁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저런 골칫거리 자체를 싫어하는 여행객들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여행객들의 가격 민감도는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좀 더 싼 여행상품 없어요?”가 지난해 고객들의 첫 질문이었다면 지금은 전혀 다르다. “자리가 있긴 한가요?” 이미 유명 여행사 인기 상품은 9월까지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자유여행 선호도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패키지 상품을 문의하다가 ‘이 상품 자유여행으로 갈 수도 있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많아요. 이미 한 번 간 여행지를 가이드 없이 또 다시 가려는 여행객도 꽤 있고요.”(롯데JTB 마포점 이정원 대리)
올해는 유럽과 미주 등 장거리 여행이 강세인 것도 특징이다. 대한항공 여름 성수기(7월 17일∼8월 20일) 예약률은 유럽 95%, 미주 89%. 아시아나항공 역시 미주(97%), 유럽(92%)행 비행기의 인기가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만큼 중국 일본이나 동남아를 한 차례 다녀온 여행객이 많다는 얘기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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