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요일인데…. 어제 보낸 전보가 어떻게 하루 만에 왔지.’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의 이일규(53) 참사관은 외무성 대표부 지도과 소속의 실세 후배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에서 목디스크 치료를 받겠다고 공문을 보냈는데 하루 만에 반려됐다. 4년 반 동안 이어졌던 후배의 괴롭힘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괴롭힘은 대사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북한식당 개업 허가를 받으러 평양에 갔던 날부터 시작됐다. 후배의 뇌물 요구를 거절했는데 그때부터 ‘자유주의자’로 소문이 났고 감시와 협박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내 자녀까지 이런 곳에서 살게 할 순 없다.’ 출국금지 전보를 바라보며, 자녀의 얼굴을 떠올리던 이 참사관은 탈북을 결심했다.
1분이 1시간처럼 더디게 갔던 망명의 순간. 제3국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예기치 못한 위기가 생겼다. 제3국이 망명을 거부했다. 재송환되면 죽음뿐이다. “쿠바로 돌려보내겠다”며 가족까지 잡아끄는 공항 경찰들에게 “난 외교관이다. 비엔나협약에 따라 우릴 붙잡아선 안 된다”고 했지만 경찰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난생처음 신께 빌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는데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세요.” 제3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였다. “이분들은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우리 국민”이라는 한국대사관의 말에 경찰들은 군말 없이 돌아갔다. 그렇게 2023년 11월, 이 참사관 가족은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16일 서울 서초구 산정현교회(김관선 목사)에서 이 참사관은 “간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 자리에 섰다”며 말문을 열었다.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 파나마에 억류됐던 북한 선박 청천강호의 억류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김정은의 표창까지 받았던 그는 “공포정치와 감시가 만연한 북한에선 더 이상 살 수 없었다”며 “북한에서 50년을 살았고 외교관으로 더 승진할 거란 기대도 있었지만 내 자식을 이런 사회에서 살게 할 순 없었다”고 말했다.
이 참사관은 “탈북 과정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다”며 “한국에 온 뒤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매주 세 가지 기도 제목을 하나님 앞에 올린다고 했다.
“목숨을 구해 주시고 대한민국에서 좋은 인연들을 맺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또 가족들과 함께 한국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길, 날마다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더 나은 사람으로 살길 다짐합니다.”
이날 예배에서 김관선 산정현교회 목사는 “우리 교회는 분단 이전 평양에 있었다”며 “분주한 일상에 묻혀 북한 동포들을 위한 기도를 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 목사는 “북한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며 “다음세대에 통일의 사명감을 전수할 수 있도록, 탈북민들이 이 땅에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자. 남북이 통일될 그날까지 눈물의 기도를 멈추지 말자”고 강조했다.
글·사진=이현성 기자 sag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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