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연합(EU)이 친환경 정책 완화 기조로 돌아서는 가운데 반대 행보를 걷는 한국 기업이 경쟁력 열위에 놓일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은 탈탄소보다 전통 에너지 생산을 우선시하고, EU 역시 탄소 배출 규제를 완화하며 경제성을 앞세운 정책으로 선회하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반면 한국은 법적 제약으로 인해 기존에 설정한 고강도의 탄소 감축 목표를 수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5일 산업계에 따르면 EU는 최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옴니버스(Omnibus) 패키지’를 발표했다. 패키지는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 공급망실사지침(CSDDD),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개정을 통해 기업 행정 부담을 완화하고 보고의무를 줄여주는 내용이다.
패키지의 개정 사항 중 핵심은 CSRD 적용 대상 기업의 대폭 축소다. 새로운 기준에 따라 CSRD 적용 대상이 직원 1000명 이상, 연매출 5000만 유로(약 773억5500만원) 이상인 기업으로 상향 조정되면서 CSRD 적용 기업 수가 약 8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CBAM 관련 규제도 완화해 기존 적용 대상 기업의 약 90%가 면제될 전망이다.
EU의 이번 발표는 과도한 규제가 유럽 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한다는 비판에 따른 조치로, 기업의 행정적 부담을 줄이고 불필요한 의무를 완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EU는 이번 개정을 통해 연간 63억 유로(약 9조7451억)의 행정비용 절감과 500억 유로(약 77조3425억원)의 투자 유치를 기대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는 지난달 7일 ‘넷제로(탄소중립)’보다 에너지 생산 확대를 우선하겠다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당시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부 장관은 “넷제로는 미국 가정과 기업의 비용을 증가시킨다”고 밝혔다.
미국과 유럽의 탄소중립 정책 후퇴는 기후위기 대응보다 기업의 경제성 제고가 더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유럽의 주요 에너지 기업들이 2021년까지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투자에 적극 나섰으나, 수익성 저하로 배당 지급에 어려움을 겪자 전략을 수정했다”며 “행동주의 펀드 등 주주들의 압박으로 화석연료 사업을 다시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가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영향이 크다. 헌재는 정부가 장기적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하지 않아 미래 세대의 환경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환경부는 내년 2월까지 2031~2049년의 구체적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이행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들은 탄소 감축 목표를 맞추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반면 미국과 EU 기업들은 규제 완화의 혜택을 누리며 상대적으로 유리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보다 현실적인 정책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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