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처럼 정보기술(IT)이 발달한 나라에서 보험금 청구를 위한 의료비 증빙서류를 종이로 보험사에 제출하고 있는 상황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일 퇴임한 손병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달 말 한 공청회에서 던진 말이다. 10년 넘도록 진도를 못 나가는 실손의료보험(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대해 답답함을 내비친 것이다. 실손보험은 전국에서 3분의 2가 가입한 제2의 국민건강보험으로 불린다. 하지만 절차가 번거로워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엔 의료계와 보험업계, 이들 양쪽 입장을 중재하고 조율하는 정책 당국 간 불협화음이 자리잡고 있다. ‘헬스 케어’ 서비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일상 속으로 성큼 다가온 서비스 영역이지만 업계 간 이견에 막혀 서비스 수준이 선진국에 크게 못 미친다. 저마다 ‘소비자 편의·보호’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실상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보험업법 개정안)은 21대 국회 들어 총 3건이 발의됐다. 지난 20대 국회 때 의료계 반발로 해당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자 이번 회기 들어 재발의된 것이다. 법안의 골자는 보험계약자 등이 요청하면 진료비 계산서 등 증빙서류를 병원 등 의료기관이 직접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 전산망을 통해 보험 업계에 전송하도록 했다.
특히 심평원이 서류 전송 업무 외에 다른 목적으로 정보를 사용 또는 보관할 수 없도록 하고, 위탁 업무와 관련해 의료계가 참여하는 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심평원이 환자 정보를 별도로 모아두거나 향후 비급여 의료비용을 심사할 것을 우려하는 의료계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법안이 통과되면 보험 가입자는 별도 서류 제출 없이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간단하게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현재까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은 여느 때보다 통과 기대감이 높은 분위기다. 하지만 의료계의 반대 입장은 여전하다. 서울시의사회는 지난달 30일 낸 성명에서 “보험청구 간소화라는 미끼로 오직 민간 보험사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법안들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험업계와 의료계 간 갈등은 ‘헬스 케어’ 시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각종 건강정보 데이터를 활용해 고객 건강 서비스 제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분야다. 업계에서는 현행 의료법상 의료행위 정의가 너무 포괄적이고, 이에 대한 당국의 유권해석 범위가 좁다고 지적한다. 반면 의료계에서는 “보험사들이 영리 목적으로 의료 데이터를 활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 보험업계 임원은 “현 상황이 이어지면 결국 소비자나 고객 입장에서는 불편함만 가중될 뿐”이라며 “보건복지부와 금융위 등 정책 당국과 정치권까지 적극 나서서 의료계와 업계 간 입장을 조율하고 중재하는 데 중지를 모아 달라”고 말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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