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헌(73). 진보진영 미술계의 대부다. 한데, 유명 포털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사회기관단체인, 전 대학교수’라고만 나온다. ‘화가’는 없다. 그런 그가 ‘나는 화가다!’라고 외치듯 회고전을 한다. 서울 종로구 김종영미술관이 원로작가를 초대해 매년 가을 여는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전에서다.
3년 만의 전시다. 지난 2016년 봄 아트스페이스풀에서 가진 개인전은 12년 만이었다. 그만큼 이런저런 ‘문화 감투’로 미술 작업을 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최근 전시장에서 작가를 만났다. “아이고, 이번에 작품 하다가 하도 붓질을 해서 (테니스엘보에 빗대) ‘붓질 엘보’에 걸렸어. 팔을 들 수 있어야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100호 이상 대작을 포함해 신작이 30여점이나 나왔다.
전시 제목은 김정헌의 삶을 함축한다. 4년 전 미국 예일대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망명 예술가들’이라는 전시를 봤다. 차도르를 쓴 한 무리의 여성들이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저 여인들은 어쩌다 위험에 내몰리게 됐을까,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우연과 필연이 겹쳐 그리된 건 아닐까. 내 삶이 그러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손위 형제들처럼 서울대 공대를 목표로 공부하던 재수생 시절, 입시학원에 질려 동네 미술학원을 기웃거린 게 운명이 됐다. 실력이 강사 눈에 띄어 서울대 미대 입학으로 이어진 것이다. 민중미술로 그를 이끈 이는 은사인 고 임영방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임 교수가 발표한 글 ‘미술의 사회적 역할’이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던 그를 송두리째 흔든 것이다.
1979년 민중미술의 모태인 ‘현실과 발언’ 동인을 시작으로 전국민족미술인연합 대표(1980~1990), 미술계의 참여연대인 문화연대 상임 공동대표(1999), 문화연대 상임집행위원회 위원장(2004~2007), 서울문화재단 이사장(2012~2015) 등 미술의 사회적 참여 현장에 그가 있었다. 공주사범대 미술교육과 교수도 지냈다.
그가 세간에 각인된 건 노무현정부에서 제2대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였다. “화가가 뭘 그런 자리까지”라는 시선이 있었지만, “‘행정 하는 미술’이라는 게 있다”고 받아칠 정도로 애정을 가진 일이었다. 정권 교체로 이명박정부에서 중도 하차를 하게 되자 출근 투쟁과 함께 해임무효 소송을 벌인 건 유명한 일화다.
문화 감투에 대해선 “내가 참 문제적 인간이다. 화가로 사회참여 미술을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일에 관심이 많다. 함께 사는 공동체 세상에서 서로 좀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하지 않나”라고 인생관을 밝혔다.
사람들을 규합해 일을 성사시키는 능력이 탁월했다. 1994년 개최한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전이 대표적이다. 민중미술 진영은 물론 추상미술을 하는 작가까지 아울러 10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전시로 키웠다. 후배들이 4·16재단 이사장으로 “이제 조용히 화가로 살려는” 그를 추대한 것은 이런 추진력과 행정 능력을 높이 산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기금마련전을 자주 했던 1990년대의 일화도 들려줬다. 양김 진영에 각각 초청장을 보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아예 나타나지 않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주 전시에 다녀갔다고 했다. 그런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문화산업’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문화를 산업적 측면에서 접근해 아쉬웠다고 했다. 그는 “문화정책은 노무현정부 때가 제일 잘했다”며 교육부가 주관하던 미술교육을 문화부에서 가져와 예술진흥교육과를 신설한 것을 높이 샀다.
어쩌다 보니 전업작가처럼 작업에 몰두할 수 없는 세월이 길었다. 작업의 완성도면에서 그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없지 않다. 하지만 “내가 봐도 내 그림이 (내용과 형식에서) 너무 잡다해”라며 개의치 않는다.
전시에는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 출품작부터 최근 신작까지 화가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신작은 산업화 너머에 주목한다. 예나 지금이나 작품에 글자가 많이 들어가는 게 공통점이다.
후배 작가 강요배씨는 “형은 그림은 안 그리고 말로 시부렁거린다”고 놀리는데, 그럴 때면 “너처럼 잘 그리지 못하니 그러지”라며 눙친다. “달빛이 세상을 비추며 인간의 이야기를 들어주듯이 나도 달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는 게 글자를 즐겨 쓰는 이유란다. 내년 1월 5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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