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삭 통한 주권 세우기’
순복음삼마교회 성도들은 아브라함의 10단계 신앙훈련 후 ‘이삭을 통한 주권 세우기’ 훈련에 들어간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깨우치는 과정이다.
며칠 전 새벽예배 때 일이다. 아동부 중에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는 똑똑한 자매가 있다. 동생은 초등학교 2학년이고 언니는 4학년인데, 동생이 항상 언니를 이기려고 한다.
새벽예배 후 동생이 기도 받으러 나왔을 때 언니에게 순종하라고 기도해줬다. 그런데 기도 받던 동생이 항의했다. “목사님, 저도 언니와 동등한데 왜 언니에게 순종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도 인권이 있어요.”
초등학교 2학년 입에서 나온 인권이라는 말에 잠시 당황했다. 그래서 물었다. “너는 인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그 아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인권은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권리에요.” “어디서 그 인권을 배웠니.”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혹시 진짜 인권의 의미를 알고 있니.” 그리고 인권의 본질에 대해 설명해줬다.
“인권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 사람에게 준 소중한 권리를 말한단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언니에게 순종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위한 인권이란다. 그 인권을 지킬 때 축복이 있단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참된 인권은 사람이 만든 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단다. 그러니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 말씀을 잘 살펴보렴.” 이튿날 새벽 그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목사님, 인권이 뭔지 알 것 같아요”라고 했다.
세상이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학교 현장이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고 심지어 반감까지 갖게 한다. 교육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을 믿기 힘들어진다. 이상한 교육 아닌가.
이런 세속적인 풍조를 야훼 신앙과 정반대인 ‘바알신앙’이라 말한다. 바알이 가장 먼저 공격한 것은 가정인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 둘째, 부부의 질서가 파괴된다. 셋째, 동성애를 통해 정상적인 가정이 사라진다. 넷째,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가 성행함으로 후손이 끊어진다. 다섯째, 레위기 18장처럼 가정이 짐승이 사는 ‘우리’로 전락한다. 심히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이러한 일들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갔을 때,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아모리 족속에게 나타난 일이었다. 이런 풍조를 교회에서 바로잡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하나님께서 보호의 울타리를 걷어내실 것이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며 축복하셨다.(창 1:26~28) 그런데 바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권리를 짓밟고 있다. 바알신앙에 물든 가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녀들이 어머니와 한편이 돼 아버지의 권위를 무너뜨린다. 이는 성경에서 니므롯을 통해 볼 수 있고 바알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야훼의 신앙은 달랐다. 그 신앙의 기초를 놓았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남편을 주(主)로 여겼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죽기까지 순종했다. 이러한 순종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했다.(마 26:42)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순복음삼마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10단계 훈련을 한다. 훈련의 중심에는 예배가 있고 예배의 중심에는 성령과 불이 있다. 성도들이 성령과 불을 받고 나면 영적인 눈이 열려 부모의 권위를 알게 되고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아브라함의 10단계 훈련이 끝나면 이삭을 통한 주권 세우기를 한다. 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훈련이다. 중요한 것은 자녀에게만 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유교와 다름없고 숨 막히는 율법에 불과할 것이다. 기독교의 순종은 부모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본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아브라함의 씨에서 순종의 자녀인 이삭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기독교 명문 가정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만든다.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 산으로 가는 이삭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수레를 끌고 가는 벧세메스의 암소가 오버랩됐다.(삼상 6:13)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는 주님의 모습도 봤다.
그러나 그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송아지에겐 법궤가 있었고 골고다로 가는 길에는 성령님이 함께 계셨다. 모리아로 가는 길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함께했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가고자 한다. 자녀에게만 효를 강조하거나 율법을 강요한다면 위험한 일이다.
교회는 설교 듣는 곳이 아니다. 설교는 유튜브나 TV를 통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교회는 성경을 알기 위해 공부하는 곳도 아니다. 하나님은 연구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사는 분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권리를 찾아주는 곳이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생명의 책이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훈련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되는 게 중요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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