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나랑” 치매 노모와 노래하는 덕수궁 버스커 [아살세]

“당신은 나의 영원한 사랑/ 사랑해요 사랑해요/ 날 믿고 따라준 사람….”

기타를 든 백지선(66)씨가 노래하자 옆에 앉은 백씨의 어머니 최양덕(96)씨가 손에 쥔 둥그런 것을 박자에 맞춰 흔들었다. 최씨가 든 것은 ‘에그 셰이크’라 불리는 리듬 악기. 치매를 앓는 그가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악기다. 최근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난 모녀는 가수 임영웅의 곡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버스킹 공연으로 선보이고 있었다. 이어 ‘광화문 연가’ ‘걱정 말아요 그대’ 등을 차례로 불렀다.

모녀의 모습을 지켜본 관객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그는 “두 모녀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다른 관객도 “어머니와 같이 노래하는 딸의 모습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진다”며 “앉아 계신 어머니의 표정이 즐거워 보여서 더 좋다”고 했다. 또 다른 관객도 “나도 부모이고 연세가 드신 부모님이 계시다보니 감정 이입이 돼서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백씨는 유튜브 채널 ‘덕수궁 돌담길 엄마랑 나랑’을 운영하고 있다. 어머니와의 추억을 기록하기 위해 시작한 이 채널은 지난 2023년 한 영상이 조회수 75만회를 기록하며 크게 화제가 됐다. 지난해 5월에는 한 다큐멘터리 방송에 두 사람의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백씨는 “오랜 간병 생활로 지쳐있던 내게 응원의 댓글이 큰 힘이 됐다”며 “댓글을 읽으며 밤새 울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백씨는 어머니의 건강을 고려해 날씨가 좋을 때만 버스킹에 나선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진행하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고, 혹시 나가더라도 부채나 여러 겹의 담요를 이용해 어머니의 체온을 보호한다. 버스킹 당일에도 날씨가 좋지 않으면 공연을 취소할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최씨는 “땀벼락(돌담길) 또 안 가냐?”라고 물어본다고 한다. 백씨는 그런 어머니와 건강관리를 열심히 해 “10년 후에도 함께 노래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다음은 백씨와의 일문일답.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서울에 거주하는 백지선이다. 원래 직업은 간호조산사였고 취미로 음악을 한 지는 40년 정도 됐다. 남편, 아들, 어머니와 함께 네 식구가 살고 있다.”

-지난 2023년10월 초, 버스킹 영상이 2주 만에 유튜브 조회 수 75만회를 돌파하며 화제가 됐는데 당시 기분은 어땠나
“버스킹을 보던 관객분이 촬영해서 올린 영상이라서 화제가 된 줄도 모르고 있다가 그 영상을 찍은 사람이 다시 버스킹 현장에 와서 (조회 수가 많이 나왔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당시 치매 어머니와 함께 공연한다는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영상으로 그 사연을 접한 많은 분들이 위로와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셨더라. 몇백개는 있었던 것 같은데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아본 적은 처음이어서 댓글을 밤새 읽으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버스킹은 언제 처음 시작하게 됐나
“2018년 어느 토요일이었다. 오랜 간병 생활로 지쳐있던 내게 남편이 버스킹 공연을 제안했다. 갑자기 공연 장비랑 악보를 가져오더니 버스킹 연습을 하러 가자며 덕수궁 돌담길로 무작정 데려가더라. 버스킹은 처음이라 정말 긴장이 됐는데 관객들이 환호하고 응원해주니 긴장했던 걸 다 잊고 공연을 즐기기 시작했다. 한 40곡은 불렀던 것 같다.”

-기타와 노래 실력 모두 수준급인데 음악을 배운 적이 있나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는데 버스킹을 계속하다 보니까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겨서 나름대로 독학을 하고 있다. 버스킹 영상을 다시 보며 노래를 분석하기도 하고 매일 2~3시간씩 노래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과거 간호조산사로 일할 때 ‘주부 밴드’인 여성 록밴드 멤버로 활동한 적도 있다.”


-어머니와 함께 버스킹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어머니와 공연을 함께한 건 4년 전쯤부터다.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어머니가 주간보호센터에 갈 수 없게 됐고 오로지 내가 돌봐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를 혼자 둘 수는 없어서 함께 공연에 나오게 됐다. 원래 공연하는 동안에는 관객석 쪽에 앉아 계셨는데 무료해 보이셔서 어머니를 옆에 앉게 하고 에그 셰이크 같은 박자 악기를 쥐여 드렸더니 좋아하시더라.”

-오랜 간병 생활로 인해 우울감을 겪었다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 후 어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았다. 시어머니에 이어 어머니까지 연달아 아프게 되면서 간병 생활이 길어졌고, 그 상황 자체가 너무 우울했다. ‘아픈 부모를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겠나’라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지만 사실 모든 게 만만치 않았다. 원래 밝은 성격이라 우울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잠도 못 자고 매일 울었던 때가 있었다.”

-우울감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음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남편 덕분에 공연을 하면서 힘이 났다. 음악은 나를 위로해 준 존재였다. 노래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우울감이 점차 사라졌고 어머니를 돌볼 수 있는 힘도 생겼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버스킹 곡이 있다면
“사실 내가 부르는 곡에 대해 분별력이 있는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버스킹 곡 중에는 잘 모르겠지만 평소에는 동요를 즐겨 듣는다. 오빠생각, 섬집아기, 찔레꽃 등을 불러 드리면 함께 따라 부르시기도 한다. 원래 치매가 진행되면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이 남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동요를 기억하시는 것 같다. 이런 거를 보면 인간의 기억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 중 하나가 동요의 선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버스킹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4살 정도 되어 보였던 꼬마 아이가 기억난다. 팽이처럼 생긴 귀여운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내가 노래를 하니까 앞에 앉아서 박자에 맞춰 엉덩이춤을 추더라. 호응해 주는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귀여웠다. 그리고 엄마가 가자고 하는데도 노래를 다 듣고 가자며 못 가게 붙잡기도 하더라.”

-앞으로의 목표나 다짐은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해보고 싶다. 언젠가 내가 아프거나 더 늙으면 그때는 노래를 더는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 전에 더 많은 관객 앞에서 노래하고 함께 호흡하고 싶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와 함께 건강관리를 잘해서 10년 후에도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노래하고 싶다. 우리 모녀를 통해 치매 환자도 이렇게 잘 살 수 있다는 희망도 보여주고 싶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박주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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