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엊그제 후배 양근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향의 향기를 머금은 유자 한 박스를 보내겠단다. 유년 시절 우리 집에도 유자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독특한 향을 지닌 황금빛 유자는 첫눈을 맞으면서 익어 간다.
동트기 전 오빠의 휘파람 소리는 나와 토끼들을 깨우곤 했다. 백여 마리의 토끼들 중에는 쑥 토끼와 점박이들도 있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면 눈을 부비며 건너편 동산을 향해 내달렸다. 풀을 먹으며 뒤처져 있는 어린 토끼들을 쫓곤 했다. 아침이슬에 흠뻑 젖은 발이 시려 올 때면 토끼들은 어지간히 배를 채운다.
“네 잎 클로버다. 오늘 어떤 행운이 올까?”
오빠는 어느새 내 손목에 클로버 팔찌를 만들어 채워 주였다. 오빠의 토끼 축산을 도운 선물이었다. 내 삶에 뿌리내렸던 순간들이 영사기 속 필름처럼 돌아간다. 오빠는 몽상가이기도 했다. 그런 정서는 글쓰기 재주로 나타났다. 글쓰기에 천재적 재능을 칭찬받던 오빠의 글이 한때 J신문에 연재되기도 했다. 오빠의 글들은 늘 죽는가 보다, 가는 가 보다는 말로 마무리가 되어 아버지는 늘 걱정하셨다. 몽상은 사고의 벽을 허물어 넓은 사유의 무대로 내보이는 것일까. 아버지 염려도 아랑곳없이 오빠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자연과 문학을 사랑하던 오빠를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네 잎 클로버의 추억은 지금도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이른 아침 바다 끝에서 햇살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우리 집 유자나무 잎새들이 유난히 반짝였다. 아래채 옆으로 우람한 수양 버드나무가 있었다. 어머니는 가을철이면 가지마다 호박꼬지와, 무말랭이, 토란대 등을 엮어 걸어 두었다. 뒷간 옆 퇴비 거름 더미에서는 아침이면 모락모락 풀 삭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할머니는 담벼락 옆 남새밭 부추를 바싹 잘라내고 왕겨를 뿌린 후 일삼아서 밟아 주곤 했다. 그래야만 봄이 되면 떡잎이 올라온다. 땅은 봄의 손길에 부풀어 오르고 생명들이 제 몸 깊숙이 들어올 수 있도록 유순해져 모든 방문을 받아들인다.
고향 집에는 대문 옆 탱자나무 울타리를 빙 둘러 유실수가 빼곡했다. 오십 년대 흉년이 찾아왔을 때는 과일나무도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다. 지혜로운 어머니는 바닷가에서 해초를 뜯어다가 먹거리를 만들었다. 왕겨를 갈아서 채에 걸러 풀죽을 쑤어 저녁 식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장독대 옆 토굴에는 어머니가 겨울 부식 거리를 보관했다. 봄이 되면 굴속에는 배추 뿌리 몇 개가 흙 속에 묻혀 있고 벽에는 마른 시래기 몇 줄만 걸려 있었다. 대가족이 흉년을 이겨내기란 기적을 만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살아 있는 사람은 굶주려도 제사상만은 차려낼 준비를 해 두었다. 조상님들 덕에 풀죽이나마 연명할 수 있다고 했다. 대문에서 대각선에 위치한 우물은 우리 집의 자랑거리였다. 어느 날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큰 사고가 있었다. 두레박에 걸려서 천만다행으로 아이가 살아났지만, 그날 이후로 한동안 뚜껑을 닫아 두었다. 가을철이면 유자들이 잎사귀와 함께 우물 뚜껑 위에 떨어져 뒹굴었다. 아버지는 그것들을 치우지 못하게 하셨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시는 아버지 정서를 내가 쏙 빼닮았다. 나는 자연을 훌륭한 스승이라 여기며 산다.
추억의 힘으로 산다는 게 이런 것일까. 사소함 속에 사소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나는 시대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랑을 받고 자랐다. 다섯 명의 오빠 다음에 고명딸로 태어났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나를 임신한 후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해산하면서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가셨다. 나는 어머니 젖을 빨아 보지도 못했다. 자신의 생명과 바꾸려 했던 어머니에 대한 간절함과 그리움이 포개어진다.
순박한 기억과 달뜬 청춘들을 품었던 고향은 켜켜이 쌓인 삶의 먼지 속에 잊혀 가고 있다. 가을철이면 아버지는 오빠들과 함께 나무들을 동여맸다. 나무들도 나이 들어 늙으면 허리 통증이 생기는 줄 알았다.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던 아버지의 초연함이 가끔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작은 일에도 얼마나 많이 초조해하며 사는가. 내가 누리고 있는 평안과 풍요에 대해 얼마만큼 감사를 드렸던가.
어머니의 삶을 떠올리면 나는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이십여 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생일, 열세 번의 제사와 차례로 어머니의 젖은 손은 마를 날이 없었다. 대가족을 이끌고 생계를 이어 가기에 뼈가 녹는 고통을 겪으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름다운 향기로 남아 있다. 오늘따라 감남골 옛집 유자향이 더욱 그립다.
<가을 밥상>
밥상 위에 떨어진
밥알 한 톨을
핏방울이라던 어머니
다듬던 푸성귀
다시 헤치며 푸른 것 한 잎
농사꾼의 눈물이라던 어머니
알알이 여물기도 전
몰아치는 태풍에
어머니 가슴은 탔다
눈물로 비를 갈망하며 뜬눈으로
긴긴밤 지새우던 오늘
기름진 가을 밥상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A)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부장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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