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출근길 서울지하철 4호선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이동권 보장 시위를 하던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한 역에서 전동차는 제법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지하철 안은 승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시위에 대해 생각을 입 밖으로 낸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신 객차와 역사에서 각각 상황을 알려주는 안내 방송이 연이어 나왔습니다.
객차 안에서는 “장애우들이 휠체어로 이동 중이니 승객들께서는 기다려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나왔고 역사에서는 “장애인 단체의 이동권 시위로 열차 출발이 지연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장애인을 친구로 부른 전자는 장애인들이 승하차를 돕는 입장에서 양해를 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후자는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것 같지만 지연의 원인을 장애인에게 돌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유력 정치인은 이 시위를 ‘비문명적, 불법 시위’라고도 했습니다. 제가 본 장애인들은 지하철을 멈추려는 행동을 억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휠체어를 탄 채 지하철에 탔고 또 내렸습니다. 비장애인인 우리는 두 발로 3초 만에 객차를 빠져나가지만 장애인들이 전동차에서 플랫폼으로 안전하게 내려가는데 수분이 걸렸습니다. 나는 주변을 돌아봤습니다. 이 지하철에 몸을 실은 우리는 어떤 마음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간 장면(막 2:1~11)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한 집에서 말씀을 전할 때입니다. 네 사람은 그 환자를 메고 가서 지붕을 뚫고 그 환자가 누운 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네 상(Mat)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했고 그는 그렇게 나음을 받았습니다.

네 사람은 걸을 수 없는 그를 위해 인파를 뚫었고, 지붕을 뜯었고, 상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이들과 같은 친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장애인들은 이동권을 생존권이라고 합니다. 이동할 수야 있어야 교육을 받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울 지하철역 중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역은 20곳이 넘습니다. 버스 10대 중 7대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아예 탈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장애인 편에 서야 합니다. 정재영 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는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심하고 배려나 복지가 부족하다”며 “사회적 약자나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시위를 벌이는 것을 이해하고 그로 인한 다소의 불편은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도 볼 수도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는 장애를 인간의 다양한 존재 양식 중 하나로 봅니다. 충현교회(한규삼 목사) 장애인 부서 담당 김유석 목사는 “공동체 구성원 중 일부가 신체적 한계로 이동이 어렵다면 이를 해결할 의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며 “전장연의 시위는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의 불편한 경험을 비장애인 다수의 경험으로 확대시켜 주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편리한 일상은 그들의 고통 위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조직신학)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억눌리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이 땅에 와 새 창조를 가져오셨다”며 “우리는 고통 받는 목소리에서 세계를 치유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통 받는 이들의 목소리에 특별히 귀 기울여야 할 이유입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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