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보기관 스파이들이 2017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분리독립 추진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폭로됐다. 러시아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와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해 서방 세계의 분열을 적극적으로 획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타국 정치 개입 의혹 사례가 또하나 늘어난 것이다.
스페인 최대 일간지 엘 파이스는 28일(현지시간) 러시아의 군 정보기관인 정보총국(GRU) 소속 요원 3명이 2016년 11월과 2017년 12월 사이 카탈루냐의 주도 바르셀로나에 위조 신분으로 침투해 체류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당시 카탈루냐는 거센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2016년 9월에는 카탈루냐 전역에서 80만여명이 대규모 분리독립 시위를 벌였고,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2017년 10월 독립 찬반 무허가 주민투표를 치렀다. 이후 이들이 선거결과를 토대로 독립공화국을 선포하자 스페인 정부는 자치권을 박탈했다.
엘 파이스가 독립언론 네트워크인 벨링캣, 시빅 미디어와 공동취재해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이들 요원 3명은 유럽 전담 공작조직 ‘29155 부대’ 소속인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GRU의 지휘를 받는 이들은 유럽 국가들 내부 정정불안을 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체제 전복, 사이버 사보타주, 암살 등 공작활동에 특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10여년 넘게 활동해 온 이들이 서방 정보 당국에 포착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세 명의 요원 중 리더격인 데니스 세르게예프는 카탈루냐 분리독립 찬반 투표 시행 이틀 전인 2017년 9월 29일에도 위조 신분으로 바르셀로나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됐다. 2018년 3월 영국 솔즈베리에서 발생한 러시아 출신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 부녀 독살 시도에 가담했다는 의혹으로 서방 정보기관들의 추적을 받아온 그는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때는 영국에 체류 중이었다. 러시아가 영국의 국민투표에 개입해 브렉시트 결정을 이끌어냈다는 주장은 그간 여러 물증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낸 바 있다. 당시 브렉시트 투표를 앞두고 영국의 트위터에는 브렉시트 관련 논의를 다룬 트윗봇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이중 90% 이상은 러시아의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에 적을 두고 있었다.
각자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배후에 러시아의 새로운 유라시아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재벌) 세력은 자신들의 과두 독재체제에 대한 내부의 불만이 높아지고 러시아의 경제침체가 길어지자 그 책임을 외부 가상의 적으로 돌리는 전략을 펴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2014년 12월 발표한 새로운 군사교리가 대표적이다. 군사교리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러시아의 최대 위협’이라고 명시돼 있다. 미국 중심 유럽 최대 안보동맹체의 통합이 러시아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러시아는 제국인 상태로 남기되 미국, 유럽 등 서방세계는 독립된 민족국가 단위로 분열시킨다는 대외전략이 일관되게 유지돼왔다.
실제 최근 러시아의 개입이 있었다고 의심받는 일련의 사건들은 서구의 통합에 반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브렉시트는 물론이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2016년 미국 대선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를 미국의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러시아의 공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트럼프 당선 이래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트럼프의 적극적인 고립주의가 서방 세계의 균열을 꾀하는 러시아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다는 주장이다.
스페인 외교 소식통들은 엘 파이스에 “스페인 정부는 오랫동안 러시아가 자국 정치 문제에 개입하고 있다고 의심해왔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러시아 측은 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스페인 언론들이 잊혀진 이슈를 다시 꺼내 반(反) 러시아 캠페인을 벌인다”고 비난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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