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박종호] 하나님이 내려주신 달란트 귀함과 천함이 있겠습니까
테너 박종호 장로
둘 중 한쪽에는 ‘불운(不運)’이 개입한 것처럼 보인다. 두 성악 천재는 같은 예고를 다녔다. 소년과 소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종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었다. 라이벌로 불렸다. 그녀는 서울대 성악과 실기수석으로 입학했고 그는 실기수석으로 졸업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세계인이 주목하는 올림픽 무대에 서고 그는 시골 교회에서 노래한다. 그녀는 소프라노 조수미, 그는 테너 박종호다.
조수미가 전설적 지휘자 헤르베르트 본 카라얀을 만나 오페라 무대를 준비할 때, 박종호는 가난한 학생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녀가 이탈리아 나폴리 국제콩쿠르에 나갈 때, 그는 국내 복음성가 경연대회를 준비했다. 박종호는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하나님 노래를 부르라는 명령을 따랐다. 그의 인생에 ‘바보처럼 휘몰아친 뜨거운 사랑’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를 “조수미 동창생”이라고 부른다.
하나님 음악 ‘싸구려’로 할 순 없다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사 지하 카페 7그램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들어서자 주인 내외가 반가워했다. “요즘 저녁마다 장로님이 부른 ‘하나님의 은혜’를 들어요.” 박종호(52·동탄지구촌교회) 장로는 “감사하다”며 6일 발매된 첫 대중가요 앨범 ‘어바웃 러브’를 건넸다. 주인은 하얀 접시에 예쁘게 깎은 사과를 내왔다. 1987년 데뷔 후 누적 음반 판매량 200만장을 돌파한 ‘가스펠계 조용필’의 인기가 실감났다.
그는 실제로 1집 ‘살아계신 하나님’을 낼 때 조용필의 음반 제작비와 같은 수준의 돈을 들였다. 박 장로는 10여년간 활동 후 1999년 미국으로 유학 갔다. “교회에서 노래하는 이나 듣는 이나 모두 패잔병처럼 느껴졌어요. 하나님을 찬양하려면 목소리도 악기도 무대도 최고가 돼야 하는데 ‘싸구려’로만 하는 거죠.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메네스음악대학원 시험을 앞두고 쓰러졌죠.”
2000년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이태 전 뇌출혈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무서웠다. 다행히 일시적 뇌출혈 증상이라고 했다. “은아 자매야. 오빠가 죽다 살아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여태 돌아다닌 것도, 이렇게 죽다 살아난 것도 다 하나님 은혜인 것 같다. 이걸로 노래 한번 만들어봐.” 그렇게 조은아 작사, 신상우 작곡의 하나님의 은혜가 만들어졌다.
2002년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은퇴하고 싶었다. “나 텍사스 어디 가서 빵집이나 할란다.” 그는 교회 사역에 지쳐 있었다. 찬양집회 인도 후 얼마 되지 않는 사례비마저 깎는 교회가 종종 있었다. 바로 그 교회가 2∼3주 뒤 한 대중가요 가수에게 수천 만원을 줬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액수보다 태도에 상처받았다. “조수미 동창이라면서요?”라며 그에게 인사했다.
“가야 한다.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가야한다”
주변에서 모두 그의 은퇴를 만류했다. “마흔 다섯에 무슨 은퇴냐. 빵집은 나중에 나랑 같이 하고 찬양 계속 해라.” 대학원 졸업식 날 그는 교회에서 노래 불렀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졌다. ‘아, 이 사랑 때문에 내가 또 찬양을 하겠구나.’ 노스캐롤라이나 미국 한인교회 집회에 갔다. 교인들이 울었다. “왜 울지?” 목회자 친구가 설명했다.
“종호야. 미국 어느 소도시에 가도 한인교회가 있어. 미군 부대 주변 기지촌에서 일하다 미 병사 만나 여기까지 시집 온 한국 아줌마들도 많아. 영어도 못하고 가족도 없고…. 한국인이 얼마나 그립겠냐.” 2003년 무렵 미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한 한인교회 초청을 받았다. “저희 교회에 와주세요. 저희 교회에는 마약 알코올 중독자들이 많아요.”
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교인은 30명가량이었다. 집회 후 학교 관리자는 빨리 강당을 비우라고 채근했다. 교인들은 대형 쓰레기통 옆에서 간이책상을 붙였다. 그는 교인들과 소시지가 들어간 김치 국밥을 먹었다. 한 교인이 다가왔다. “선교사님, 그거 아세요? 저희 목사님 폐암 말기세요.” 박 장로보다 세 살 아래였다. ‘마지막까지 주님의 일을 하는구나.’ 목이 메어 밥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는 미 50개주 한인교회를 다 돌기로 했다. 교회주소록을 샀다.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한인교회에 갔다. 집회 후 담임 목사가 부탁했다. “알라모고도에 저희 지교회가 있어요. 거기 좀 가주시겠어요?” 박 장로가 성도들이 몇 명이 나오냐고 물었다. “글쎄요. 2∼3명 나오려나.” 그는 그 교회로 가는 동안 서서히 분노가 치밀었다. ‘하나님, 제가 두세 명을 위해 5시간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씩 차 타고 가야 합니까?’ 급기야 화를 냈다. ‘난 못 가요. 천하의 박종호가 그런 데까진 못 갑니다. 그런 데는 하나님이 가세요. 하나님이 노래 못하시면 배워서 가세요.’
박종호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시락’
이 순간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그때 처음 알았어요. 하나님은 음성도 듣는 사람 성격에 맞춰 하신다고. 나한테 ‘야, 너 잘 났다. 네 ○ 굵다. 네가 아무리 큰 무대 서고 싶어 해도 넌 복음성가 가수야. 넌 나를 노래하는 거야. 넌 가야 해.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노래해야 하는 거야!’ 그러시는 거예요.” 그는 통곡했다.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는 25명이 모여 있었다. 그를 보기 위해 인구 7000명 소도시의 한인들이 다 왔다. 반경 100㎞에 한국인 23명이 사는 곳이었다. 그를 잘 아는 후배가 우연히 부친을 모시고 먼 곳에서 왔다. 목사는 “저희 교회 집사님들은 다 소시지 공장에서 일해요. 하루 종일 방망이로 천장에 걸린 고깃덩어리 두들겨요”라고 했다.
집회 후 한 여 집사가 다가왔다. “선교사님 이거 아까 말씀하신 그 영국 선교사님 갖다 주세요.” 박 장로는 찬양 집회 후 음반을 판매한다. 그 수익금은 모두 선교사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었다. 기부를 시작한 건 영국에 있는 예수전도단의 한 선배 때문이다. “언젠가 LA에서 집회하고 나오는데 그 선배가 런던에서 쓰레기통 뒤져서 먹고 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뇌종양인데 치료비도 없고….”
여 집사는 척추장애인이었다. 미 병사의 아내로 시집 왔다. 그녀가 내민 것은 10달러짜리 지폐였다. “괜찮습니다.” 박 장로는 사양했다. 그러자 “이 돈 제가 점심 두 끼 굶고 만든 거예요”라고 했다.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가 깨달았어요. 내가 오병이어(요 6:1∼15)에 나오는 떡이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 먹이는 데 쓰시는 도시락이구나. 내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날 사용해 부르시는 거구나.”
그 집사는 눈시울을 붉히며 부탁했다. “선교사님, 일본 오키나와, 독일 프랑크푸르트…거기 가서도 저희같이 외로운 사람들 위해 노래해 주세요.” 전 세계 미군 기지가 있는 곳을 열거했다.
2002년부터 매년 10만4000달러 기부
대학시절부터 예수전도단에서 훈련 받았던 박 장로는 이렇게 모은 돈을 예수전도단에 헌금해 왔다. 2002년부터 매년 10만4000달러를 기부했다. 예수전도단 선교사는 이 덕분에 입국 시 건강검진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예수전도단 선교사들이 다 자비량으로 선교하잖아요. 건강검진 받을 돈도 없어요. 그래서 영국에 그 형처럼 되기도 하고요.” 그는 탄자니아와 인도에 각각 에이즈를 앓고 있는 어린이를 위한 고아원 2곳을 지었다.
그는 거액을 기부하지만 자신은 서울 마포구 한 아파트에서 월세로 살고 있다. “제 아내, 아이들이 제 재산이에요.” 그는 대학 4학년 때 결혼한 아내 김선아(51) 집사 사이에 세 자녀 지현(28) 찬영(26) 지윤(25)을 뒀다.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한 지현은 바이올리스트, 나란히 뉴욕대를 졸업한 찬영은 미국 금융가에서 일하고, 지윤은 계속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미 유학 시절인 2000년 청와대의 공연 제의를 거절한 적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방미해서 조찬기도회를 열 예정이라면서 오라는 거예요. 난 안 된다, 대학원 공부하기 바쁘다고 했죠. 그랬더니 담당자가 어이없어 하더군요.” 그런 박 장로는 요즘 전국 교회주소록을 들고 전화를 돌린다. “최근에 강원도 한 목사님에게 전화했어요. ‘그 교회 가서 노래 불러도 될까요?’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여길 왜 오냐고 되물으시더라고요.”(웃음)
박 장로는 미국 소도시 한인교회를 다녔듯이 노래가 필요한 국내 곳곳도 다니고 싶다. “사실 교계에서는 절 보고 비싸게 군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전 그냥 마음 가는 곳에 갈 뿐이에요. 좋은 척 착한 척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이 말 멋있죠? 하하. 영화 역도산에 나오는 말이에요.” 참 발랄한 ‘장로님’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Ŭ! ̳?
Ϻ IJ о
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