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강인섭 회장 인터뷰
[미션라이프] 두루마기 차림에 오른 손에 폭탄을 든 노인이 서울 한복판에 서 있다. 주먹을 꽉 쥔 왼손과 결연한 의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지난 2일 서울역 광장에 세워진 강우규(1855~1920) 의사의 동상이다. 동상은 높이 4m90㎝, 좌대 1m 25㎝에 이른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 리오.’ 동상 밑에는 순국 직전 남긴 강 의사의 유시가 새겨져있다. 8일 지나가던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노(老) 애국지사 앞에 섰다. 무리 뒤편에 노인 한명이 서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강인섭(75) 회장이다.
-어떤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동상을 만들었는가.
“1919년 3·1운동이후 두려움을 느낀 일본은 무장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지 정책을 변경했다. 당시 일본의 회유에 많은 국민이 현혹됐고 강 의사는 일본의 기만에 분노했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문화통치가 아닌 조국의 완전한 독립’이라 외치며 같은 해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정거장(현 서울역)에서 환영행사를 마치고 관저로 떠나는 신임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의거는 실패했지만 국민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강 의사의 나이 64세 때다.”
-강 의사가 안중근, 윤봉길 의사에 비해 행적이 덜 알려져 있다.
“주로 국외에서 활동해 자료 수집이 어려웠다. 후손들은 강 의사 순국 후 흩어져 만나기 어려웠다. 강 의사는 개화사상에 관심을 갖고, 1884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장로교에 입교했다. 홍원에 한약방을 열고 상당한 재산도 모았다. 그는 곧 홍원 읍내에서 학교와 교회를 세워 교육으로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복음을 전파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이듬해 북간도 두도구로 망명했다. 1915년에는 요하현으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다.
또한 농토를 개간해 신흥촌을 건설했다. 수많은 망명자가 그곳에 모여들었다. 1917년 동광학교와 교회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 노인단 길림성지부장으로서 조직적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그해 5월 노인단원 이발, 정치윤 등 5명이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히자 강 의사는 노인단 대표로서 국내에 잠입, 일본총독을 암살키로 결심했다.”
-국내로 들어와 의거를 행하기 어려웠을 텐데
“물론이다. 강 의사는 7월 블라디보스토크, 원산 등을 거쳐 8월 서울로 왔다. 검문을 피해 두달 동안 수류탄을 사타구니안에 품고 왔다. 여담이지만 당시 노인단 가입 기준 나이는 45세였다. 64세였던 강 의사는 현재로 치면 80대 노인으로 볼 수 있다.
-강 의사의 발자취를 알리는 일에 앞장서는 이유는
“인상 깊은 면이 있다. 강 의사는 신앙과 교육을 중시했다. 가는 곳마다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지난 2일 동상제막식에 강 의사의 외증손자 최수철(75) 씨가 참석했다. 그에게 들으니 강 의사는 손녀 강영재(최씨의 어머니)씨에게 입버릇처럼 ‘예수 잘 믿어야 한다. 그것이 독립의 길이다’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강씨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지난 87년 돌아가실 때까지 서울 불광동 은광교회에서 신앙을 이어갔다. 최수철씨는 현재 서울 성락교회에 다닌다.
또 강 의사는 1920년 교형에 처해지기 전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너무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동상제막식에 오산고 학생 1000여명을 초청했던데
“강 의사의 삶 자체가 교육 자료다. 그날 오산고 2학년 석지호 군은 ‘강우규 의사에게 바치는 글’을 낭독하며 ‘올곧은 정신을 가졌던 강우규 의사에 대해서는 부끄럽게도 잘 알지 못한다’며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불의에 항거한 의사의 뜻을 기억하고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강 의사의 유지를 따라 젊은 세대에게 민족의식을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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