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빵’ 터졌다… ‘식량전쟁의 서막’ 이집트
이집트 사람들은 빵을 정말 많이 먹는다. 바게트의 나라 프랑스인들이 하루 평균 130g을 먹는데, 이집트는 무려 400g을 먹어치우는 세계 최대 빵 소비국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골목마다 있는 빵집에 가서 통밀 반죽을 화덕에 구워낸 ‘아이쉬(Aysh)’를 산다.
이 납작하고 둥글며 속이 빈 빵을 뜯어서 치즈를 발라 먹으면 아침이고, 샌드위치처럼 채소를 끼우면 점심이고, 양고기를 곁들이면 저녁이다. 2008년 아이쉬 굽는 이들이 파업을 하자 정부는 긴급 조치로 군대를 동원해 빵을 굽게 했다. 아랍어로 아이쉬는 ‘생명’이란 뜻이다.
이집트인들의 생명줄인 이 빵을 공급하기 위해 역대 정부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보조금 제도를 채택했다. 정부가 밀가루를 제공하는 ‘국영 빵집’이 동네마다 있고, 8000만 인구의 40%가 넘는 빈곤층은 민간 빵집보다 훨씬 싼 이곳에서 아침마다 줄을 선다.
미국 일간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지난달 29일자 기사에서 아이쉬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집트에서 빵은 식량이기 전에 통치자와 국민이 맺은 일종의 계약이다. 통치자가 권력을 갖는 대신 국민들에게 빵만큼은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이 ‘계약’이 깨질 때 이집트인들은 분노했다. 1977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외자를 유치하려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주문대로 밀가루 보조금을 없애려 했다. 빵값이 급등하게 되자 도시마다 폭동이 일어났다. 800여명이 목숨을 잃고 보조금은 유지됐다.
4년 뒤 사다트가 암살되고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이 출범했다. 30년 장기집권을 견디던 이집트인들이 다시 폭발한 것은 2008년이다. 국제곡물시세가 사상 최고치로 치솟아 밀가루 공급이 부족해진 시점이다. 국영 빵집에서 아이쉬를 사려면 너덧 시간 줄을 서야 했고, 1인당 20개로 구매량도 제한됐다.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은 정부가 군대 예산을 돌려 밀가루를 더 수입한 뒤에야 화를 풀었다.
그리고 2011년. 3주째 계속되고 있는 카이로 반정부 시위대의 구호에도 아이쉬가 있다. 타흐리르 광장 시민들은 “아이쉬, 호레야(자유), 카라마 인산나야(인권)”를 연호했다. 독재정권을 향해 외친 세 가지 요구에서 자유, 인권과 함께 빵이 등장한다. 이번엔 이집트의 빵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푸틴과 버냉키
카이로 교민 김영(40)씨는 8일 통화에서 장보러 가기 무서워진 지 한참 됐다고 말했다.
“2004년 이집트에 왔는데 물가가 그때보다 엄청 올랐어요. 집세도 2배가 됐고, 특히 식료품 값이 많이 올랐죠. 품목에 따라 50∼200% 정도. 제일 싼 과일인 오렌지가 1㎏에 2.5파운드(이집트파운드)에서 4파운드로 뛰었고, 아이쉬는 1파운드 내면 20개씩 줬는데 지금은 10개도 안 줘요. 최근에 물가가 급격히 오른 건 지난해 중반부터인 것 같네요.”
지난해 중반, 그러니까 카이로에서 비교적 부자동네라는 마하디 지역의 김씨가 물가 상승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2010년 여름, 그때 러시아의 날씨는 무척 더웠다. 밀 수확기로 접어드는 6월부터 이상고온에 가뭄과 산불이 계속돼 밀 재배지의 25%가 망가지고, 수확은 40%나 감소했다.
국내 수요 맞추기도 빠듯해지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그해 7월 밀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이집트의 연간 밀 수요는 1300만t. 이 중 700만t을 사다 먹는 세계 최대 밀 수입국인데, 주 수입원이 러시아였다.
약 한 달 뒤인 8월 11일 이집트 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모두 빵값 얘기다. 관영 알 아흐람은 ‘아이쉬 가격은 변함없다’는 제목 아래 정부가 프랑스와 24만t 밀 수입 계약을 체결했다고 전했다. 반면 정부 통제가 덜한 민영 알 쇼루크는 “러시아 밀을 비싼 프랑스 밀로 대체하는 비용이 최대 12억 달러(약 1조3000억원)나 된다”는 기사를 실었다.
곡물은 가격탄성률이 가장 높은 상품이다. 수요와 공급이 조금만 어긋나도 가격은 급격히 오르내린다. 러시아 금수조치 이후 국제 밀 시세는 두 달 만에 50% 급등했다. 이집트인들의 빵 걱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남반구는 12∼2월 밀을 수확한다. 이집트 정부는 세계 4위 밀 수출국인 아르헨티나 물량을 확보하려고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와 급히 무역협정을 체결했지만, 아르헨티나도 라니냐로 작황이 크게 악화됐다(같은 남반구 밀 수출국인 호주 역시 최근 이상기후로 혹독한 물난리를 겪고 있다).
이제 기댈 곳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최대 밀 생산국 중 하나이고, 잉여농산물이 가장 많은 나라이며, 이집트의 오랜 식량원조국이다. 그런데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지난해 8월 그는 ‘2차 양적완화’ 정책을 발표한다. 경기회복이 더디고 인플레이션은 아직 적으니 달러를 더 찍어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금리인하 효과가 생겨 미국 내 소비가 늘겠지만, 대신 달러의 가치가 떨어져서 투자자는 달러보다 현물을 갖고 있는 게 유리하다. 기상이변에 툭하면 수확이 감소하는 쌀 밀 옥수수 콩 등 곡물이 가장 확실한 투자처가 됐다. 이집트가 밀을 구하려 동분서주할 때 헤지펀드들이 앞다퉈 곡물시장으로 달려갔고, 밀값은 더 가파르게 뛰었다.
헤지펀드 매니저 마이클 맥마스터는 이미 2008년 미 상원 청문회에서 “금융위기로 투자처를 찾지 못한 투기자금이 곡물시장에 유입되고 있다. 요즘 식량 거래의 70∼80%는 사재기다. 이는 식량 가격 상승과 기아 인구 증가를 부른다”고 증언했다. 이런 추세에 버냉키 의장이 기름을 부은 꼴이다.
지난해 이집트 식료품 값은 평균 20% 이상 폭등했다. 아이쉬도 민간 빵집에서는 가격이 25%나 올랐다. 비싼 밀가루 사오느라 재정 압박에 시달리던 이집트 정부는 지난해 10월 “고품질 빵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국영 빵집의 아이쉬 가격을 올리려다 반발에 부닥쳐 포기했다.
금상문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연구교수는 “튀니지에서 시작해 이집트 알제리 예멘 등 북아프리카로 번진 시위 사태는 물가 폭등이 촉발한 시민 혁명이다. 올해 최대 경제리스크로 꼽힌 인플레이션이 정권을 위협하는 정치 리스크로 번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이 고기를 먹으니…
이철호 고려대 식품공학부 명예교수는 지난해 사재 1억원을 출연해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을 설립했다. 그도 이집트 사태는 민주화 혁명이기 전에 식량 파동이라고 단언한다. 독재정권에 누적된 불만을 폭발시킨 방아쇠가 아이쉬라는 것이다. 무바라크 정권이 흔들리듯 식량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문제라는 게 이 재단 연구의 출발점이다. 8일 고려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나 물었다.
-2008년에도 세계 각지에서 식량 폭동이 있었는데 원인이 뭐였나요?
“미국의 바이오 연료 정책입니다. 2007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옥수수를 발효시켜 만드는 친환경 에탄올로 자동차 휘발유를 20% 대체하겠다고 발표했어요. 그 뒤로 미국은 밀 대신 연료용 옥수수를 재배하라고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줍니다. 식량으로 쓸 밀과 옥수수가 한꺼번에 줄어드는 거죠. 세계곡물보유량이 급감해서 사재기가 벌어지고 이집트를 비롯해 30개국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FAO(유엔식량농업기구)가 엄청나게 비난했어요. 굶주리는 인구가 10억 명인데 뭐하는 짓이냐고.”
그래도 그때는 6개월쯤 지나서 수급이 호전됐다. 금융위기로 세계 경기가 악화돼 식량 수요도 줄어든 덕이었다. 지금은 거꾸로 중국 인도 같은 거대 신흥국 경기가 회복되는 시기다.
-이번 식량 파동의 최대 원인은 뭘까요?
“기상이변, 곡물투기, 바이오 연료, 유가 상승… 여러 요인이 섞여 있지만, 중국과 인도의 식생활 변화도 큰 부분이에요. 경제가 성장하면서 늘어난 두 나라 중산층의 육류소비가 급증하고 있어요. 축산은 곡물을 사료로 만들어 먹이잖아요. 소는 단백질 100g을 사료로 주면 체내에 축적하는 게 5g밖에 안 돼요. 쇠고기로 한 끼 배를 채우면 사람 20명이 먹을 곡물을 먹는 셈이죠. 중국 인도 20억 인구가 고기를 먹게 됐다는 건 세계 곡물을 싹쓸이한다는 얘기예요. 또 아시아 국가는 경제가 발전하면 식생활이 서구화되는데, 밀가루를 많이 먹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밀 소비가 쌀의 절반 수준까지 높아졌고, 중국도 같은 과정을 밟고 있어요. 이집트나 튀니지처럼 밀이 주식인 북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는 불행한 일이죠.” 》22면에 계속
-G20 회의에서도 식량 파동 대책을 논의한다는데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개선될 가능성이 별로 안 보여요. 기상이변은 더 잦아지죠, 중국과 인도는 계속 성장하죠, 곡물시장은 투기장 된 지 오래고, 친환경 대세에 바이오 연료는 계속될 테고, 인구는 꾸준히 증가합니다. 과거 10여년에 한 번씩 찾아오던 식량 파동 주기가 3∼4년 단위로 짧아졌어요. 이미 고착화돼서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들고 있어요. 지금 북아프리카를 보세요. 튀니지 이집트가 무너지니까 알제리 예멘이 밀을 엄청나게 사들이고 있습니다.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그럼 또 밀값이 오르고, 사재기가 나오고, 다른 가난한 나라가 폭동을 겪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 식량은 분배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식량 생산은 충분한데 부자나라에 쏠리는 게 문제라는 거였죠. 10∼20년 안에 식량의 절대 부족 현상, 식량전쟁 상황이 올 수 있어요. 10∼20년이란 건 우리나라 80년대 수준인 중국 경제가 지금 우리만큼 살게 될 때를 말하는 거고요.”
식량전쟁 10∼20년 남았다…한국은?
-우리나라 식량 사정은 어떻습니까?
“곡물 자급률이 26%밖에 안돼요. 이건 국토가 온통 사막인 사우디아라비아 수준이에요. 사우디도 20%가 넘거든요. 다른 식품까지 포함한 식품에너지 자급률도 50% 정도입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이미 한국을 식량위기가 우려되는 국가로 분류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모릅니다. 식량 하면 쌀이고, 쌀은 늘 남아서 문제라니까 식량이 남는다고 생각하죠.”
-식량 자급률은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아요. 완전 자급은 불가능합니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죠. 쌀은 많으니까 이제 콩을 자급해야 돼요. 우리 식단을 보면 쌀과 콩만 있으면 일단 먹고 살 수 있어요. 간장 된장 두부 콩나물, 이런 게 다 콩인데 콩을 너무 버려두고 있어요. 식용 콩 수요가 연간 40만t이고, 국내 생산은 18만t입니다. 나머지 22만t도 잘하면 자급이 가능해요. 쌀이 남아도니까 논을 콩밭으로 바꾸도록 인센티브 주고, 정부가 쌀 수매처럼 콩 생산도 지원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경제의 최대 고민도 물가다. 이미 구제역 파동과 국제 원자재 값 상승에 식품 가격이 뛰기 시작했다. 정부 경제팀은 물가 상승률을 3%선에서 묶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런데 이 교수는 “어떻게 보면 식품 값이 너무 낮은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강제로 식품 값 상승을 억누르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길게 보면 점진적으로 오르는 게 맞아요. 이제 국제 곡물 값은 계속 오를 겁니다. 식량은 부족해질 테고요. 이런 현실을 반영해서 가격이 점차 올라야 소비자가 지금처럼 식품을 낭비하지 않게 되고, 국내 농업도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식량자급률이나 물가 관리는 정부의 몫이다. 소비자들은 다가올 식량 전쟁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이 교수는 우리 고유의 식단, 쌀 콩 채소의 식생활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80%에 육박하던 우리 식량 자급률이 80년대 경제성장 이후 고기를 많이 먹게 되면서 지금 이렇게 낮아졌어요. 동물성 식품을 덜 먹어야 합니다. 이건 굉장히 비경제적인 식단이에요. 소고기 1㎏ 생산하려면 곡물 8㎏을 먹여야 합니다. 또 건강에도 나빠요. 다행히 우리는 경제적이고 건강에 좋은 전통 식단이 있습니다. 지금 육류소비에 조금만 브레이크를 걸면 희망이 있어요.”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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