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가족과 튀르키예를 다녀왔다. 3년 만에 다시 선 이스탄불의 역사·문화 중심지 ‘술탄 아흐메트’에는 고색창연한 건축물이 즐비했고 볼거리도 여전했다.
여행 둘째 날 새벽 러닝화를 신고 거리로 나섰다. 100m쯤 달려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니 ‘아야 소피아’가 시야에 들어왔다. 537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세운 성 소피아 성당이 지금의 아야 소피아다. 동방정교회의 본산으로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과 함께 한때 세계 교회를 대표했다.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직후 승리를 선포한 곳도 바로 이 성당이다. 이후 성당은 모스크로 바뀌었고 20세기에는 박물관이 됐다가 다시 모스크가 됐다.
1500년 전 세워진 성당의 압도적인 모습을 뒤로하고 ‘코블 스톤’(작은 돌을 촘촘히 깔아 만든 길) 위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 상쾌했다.
이스탄불은 거대 제국들의 심장부였다. 330년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곳을 콘스탄티노플로 명명한 뒤 1100년 동안 종교와 문화, 건축미의 절정을 뽐냈다. 1453년 메흐메트 2세의 함락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의 품에 안겼다. 그중에서도 765만㎡(231만5000평) 넓이의 술탄 아흐메트는 축구장 1070여개가 들어가는 방대한 규모로 동로마와 오스만 제국이 남긴 수많은 유적이 어우러져 있다. 여전히 땅속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유산도 적지 않을 정도다.
북서쪽으로 1㎞ 남짓 달리자 ‘톱카프 궁전’의 웅장한 성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회색과 아이보리빛 석재가 층층이 쌓인 성벽은 제국의 위엄을 품은 거인처럼 묵묵히 이방인을 맞았다.
성벽을 끼고 ‘소우쿠체슈메 거리’ 쪽으로 접어들었다. 소로(小路)로 들어서자 어느새 혼자가 됐다. 궁전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각국 언어로 시끌벅적하던 관광객들의 말소리도 서서히 옅어졌다. 마치 시간여행으로 이끄는 입구 같았던 길은 이내 트램이 오가는 번화가에 닿았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 ‘귈하네’가 골목 끝에 나타났다. 한때 황제의 정원이었으나 1912년 일반에 개방돼 때마다 튤립과 장미꽃을 틔우고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긴 그늘을 드리운다.
이날 뛰기로 했던 4㎞를 채우기 위해 곧장 호텔로 가지 않고 낯선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집집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지 고소한 향이 거리를 채웠다. ‘시미트’(참깨빵) 같은 전통 빵이 구워지는 고소함이나 ‘차이’라고 부르는 홍차의 향기가 끊이지 않았다. 올리브유에 뭔가를 볶는 구수한 기운이 퍼지자 꼬르륵 소리가 절로 났다.
블루 모스크로 더 잘 알려진 ‘술탄아흐메트 모스크’는 숙소 근처에 있었다. 아야 소피아와 술탄아흐메트 모스크 사이의 길을 달렸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숨소리는 거칠어졌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여행의 피로는 오히려 사라졌다.
곳곳에 남은 제국의 건축물은 범인들을 과거로 인도하는 비밀의 통로처럼 느껴졌다. 이른 아침,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여러 유적 주변을 달리며 체험한 건 이번 여행의 큰 성과 중 하나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달리는 내내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발 아래 돌길마저 수백년 전 황제와 술탄의 발자취를 품고 있지만 그들의 제국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호텔 로비에서 숨을 고르는데 벽에 걸린 그림 속 이스탄불 전경과 도시를 둘러싼 마르마라해, 골든 혼이 보였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제국과 권력도 결국 시간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남은 건 건물과 돌, 그리고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뿐이다. 그 순간 불현듯 복음만이 영원하다는 믿음이 떠올랐다. 결국 중요한 건 우리 각자가 바로 지금, 어디를 향해 어떻게 달려가고 있느냐 하는 것 아닐까.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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