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드라마 명대사 중에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는 말이 있다. 사람을 사물처럼 취급하는 좋지 않은 표현이지만 임팩트가 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사용한다. 사람이 바뀌길 기대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제법 효과적인 것이 사실이다. 누구든 이 말을 들으면 사람에게 실망하고 다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이렇게 해주면 상대방이 미안해서라도 변하겠지’라는 믿음에 배신을 당한 경험 말이다.
어떤 행동이 행해지는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경향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괴테도 “모든 일에서 각자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돼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는 이유도 그 ‘하나’의 행동을 만드는 경향성의 규정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경향성은 그동안 인생 경험에서 가지게 된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른 행동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상당히 안정적인 특성으로 정립된 것이다. 그래서 설사 당사자 스스로 싫어하는 경향성일지라도 어느새 그 경향성에 따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경향성을 거스르는 것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경향성을 공고히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기존 믿음 체계와 잘 맞지 않는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기보다 자신도 모르게 ‘그 새로운 생각은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없다’는 증거를 찾는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게 된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자신의 경향성을 검토하지 않는 태도다. 이런 식으로 편리하게 생각을 연결해버리면 자신이 굉장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다.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만 받아들이니 기존의 경향성이 강화되기만 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게 바꾸라고 하는 사람보다는 지금의 자신을 좋다고 해주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편하게 있고 싶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만 자신의 경향성을 검토하는 능력이 있다. 다른 동물은 본능에 프로그래밍된 대로 살아가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본능에 결정당하는 인간을 두고 인간답다고 하지 않는다. 본능의 힘에도 불구하고 본능에 결정당하지 않고 본능을 검토해 본능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구분하는 것을 ‘인간답다’고 한다. 또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을 ‘인간답다’고 하지 않는다. 힘들어도 의무와 도리를 다할 때 그 사람을 ‘인간답다’고 한다. 인간다움은 이러한 넘어섬(초월)에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 자신의 경향성을 검토하고 그 경향성의 약점을 제어하려 노력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경제학자로 유명하지만 도덕철학자이기도 한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 이렇게 썼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많은 것을 느끼고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는 적게 느끼며 우리의 이기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우리의 자혜(慈惠)적인 성정을 개방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완성을 구성한다.”
박은미 철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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