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노벨평화상과 F-18

입력 2025-12-13 00:40

그는 베네수엘라 마두로 독재 정권의 체포망을 피해 8일(현지시간) 한 어촌 마을로 향했다. 가발을 쓰고 군 검문소 10곳을 통과한 뒤, 카리브해를 건너는 작은 목선에 몸을 실었다. 배는 강한 바람과 파도로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고, 미군의 오인사격 가능성도 있었다. 그가 해상을 건너던 시점, 미 해군 F-18 전투기 두 대가 약 40분간 해당 해역 상공을 선회 비행했다. 네덜란드령 퀴라소에 도착한 그는 이후 미국을 거쳐 마침내 11일 노르웨이 오슬로에 닿았다. 영화 007 시리즈를 방불케 하는, 나흘간의 목숨을 건 극비 작전이었다.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베네수엘라 민주화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58) 이야기다. 노벨위원회조차 그의 위치를 알지 못할 정도로 출국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노벨평화상은 비폭력과 인권의 상징이다. 반면 F-18은 군사력의 상징이다. 이 둘이 한 장면에 겹쳐진다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더 이상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평화가 전투기의 보호 아래 놓인 장면은 오늘의 민주주의가 처한 역설을 드러낸다. 이 역설은 베네수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서방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체제를 유지해 왔고, 홍콩은 대규모 민주화 시위 이후 외부의 실질적 개입 없이 정치적 공간이 급속히 축소됐다. 어떤 민주주의에는 군사적 보호가 작동하고, 어떤 민주주의에는 외교적 언급만 남는다.

마차도의 탈출은 한 개인의 용기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위험을 감수했고, 그 선택들이 모여 한 사람을 오슬로까지 데려왔다. 출국금지 상태인 마차도는 베네수엘라에 돌아가면 체포·기소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그는 노벨평화상을 들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다시 한번 목숨을 건 극비 작전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그때도 미국은 그의 안전을 위해 F-18을 띄울까. 그 질문 자체가 오늘의 민주주의가 놓인 자리를 말해준다.

한승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