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의 한 월요일 오후,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를 지나는 버스 안에서 불이 났다. 방과 후 귀가하던 16세 청소년이 다른 좌석에 앉아 깜빡 잠들어 있던 또래 학생의 치마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 것. 순식간에 번진 불에 피해자는 전신에 중증화상을 입는다. 두 학생 사이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피해 학생의 이름은 사샤. 사립학교에 다니는 백인 중산층 가정의 학생이었고, 가해자 리처드는 우범 지역으로 꼽히는 가난한 동네의 공립학교에 다니는 흑인 청소년이었다. 교집합이 된 건 이날 귀갓길, 우연히 ‘57번 버스’를 함께 탔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발적 장난이나 실수로 치부하기엔 피해자에게 수십 차례의 수술이 필요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긴 이 사건은 당시 미국 사회를 들끓게 했다. 더구나 피해자가 스스로 어떤 성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에이젠더’, 즉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이 혐오범죄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졌다. 가해자에게 중상해죄뿐 아니라 혐오죄를 적용해 소년 법정이 아닌 성인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팽배해졌다. 엄벌에 처해 사회에서 최대한 오래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소년법 테두리 안에서 교화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의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놀라운 건 이후 재판과 중재 과정, 피해자와 가해자 측 대화 속에서 이어진 진지한 논의다. 피해자 사샤와 부모는 가해자 소년 리처드를 악마화하고 평생 교도소에서 썩게 하는 일이 사샤의 화상을 치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결국 리처드는 소년범으로 처벌받는다.
당시 사건과 사회적 논의 과정을 저널리스트 작가인 대슈터 슬레이터가 치밀하게 추적해 정리한 책 ‘57번 버스’에 담긴 내용이다. 몇 년 전 중학생이었던 딸의 과제 때문에 우연히 접했던 이 책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은 건 사건 이후 움직인 일부 어른들의 사려 깊은 고민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자 사샤 어머니는 재판부에 이런 편지를 보낸다. “리처드가 감옥에서 썩는다고 해서 사샤의 피부가 다시 돌아올까요. 저는 리처드가 그의 잘못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변화하여 다시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가 등장하기까지 과정이 쉬웠던 건 결코 아니었다. 사샤 부모가 가해자를 그냥 용서하자 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자녀와 같은 또래의 아이를 악마화하고 배제하는 것이 피해를 회복시켜줄 수는 없다는 고통스러운 사유 끝에 잘못은 심판하고 책임지게 하되 변화의 가능성은 열어주자는 결정을 내렸다.
2021년에 나온 이 책을 기억에 소환시킨 건 예상했겠지만, 최근 배우 조진웅의 소년범죄 이력이 공개되며 불거진 논란이었다. 책에서처럼 소년범에게 기회를 주고 회복적 정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니 한 번 처벌받은 이는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거나, 소년범죄 이력을 공개한 것이 잘못됐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갈수록 잔혹해지는 소년 범죄, “촉법소년이라 교도소 안 간다”며 법을 조롱하는 일부 아이들의 모습 등은 우려를 키우기 충분하다. 소년법을 악용하는 현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들의 문제, 학교폭력 처벌과의 경중 문제 등까지 따질 문제도 많다.
지금 논란이 안타까운 건 잘못을 저질렀지만 결국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의 앞날과 피해자 치유를 위한 어른의 사유가 이번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도 내편 네편을 가르는 정치적 소모전은 진저리가 난다. 어떤 식으로든 분노는 쉽고 배제는 간편한 듯하다. 그러나 상처 입은 피해자를 보듬고, 죄를 지은 아이를 변화시켜 다시 우리 사회로 데려와 품어내는 일은 훨씬 어렵고 지난하다.
누군가를 낙인찍고 배제하는 일도 쉬운 건 아니다. 처벌 받은 이들도 결국 우리 곁으로 돌아올 이웃이라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사회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건 어쩌면 섣부른 배제일 수도 있다.
조민영 미션탐사부장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