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높게 쌓인 짚단은 나의 놀이터였다. 나는 그 위로 올라가 매가 크게 원을 그리며 도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볏단은 새 둥지처럼 포근했다. 마른 짚단 냄새를 맡으며,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 태양 아래 비춰 보곤 했다. 우주의 행성 같기도, 고양이 눈동자 같기도 한 영롱한 구슬이었다.
어릴 적 나는 머리카락이 노란 편이라 동네 사람들은 나를 ‘노랭이’라고 불렀다. 호기심이 많은 터라 가끔 이상한 짓을 한다고 혼이 나기도 했다. 구슬을 입에 넣고 사탕처럼 혀로 굴려 보거나, 종이 맛이 궁금해서 씹어 봤다가 금세 뱉어 버렸다. 햇빛 사이로 먼지가 반짝이는 오후, 짚단 위에서 나의 상상은 달콤하게 부풀었다.
나를 현실로 끌어당긴 건 동네 아주머니였다. “노랭이, 거기서 혼자 뭐 해?”
볏단 위에서 혼자 뒹굴던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아주머니가 툭 던진 말이었다. 나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그냥 놀아요”라고 대답했다. 금방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한 말로 옮길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장 발길을 돌렸다. 잘못한 일은 없는데 괜히 잘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머니가 가고 나자 짚단은 더 이상 아늑하지 않았다. 비밀 장소라 믿었던 공간이 들통나 버려서였을까. 돌아보면 그곳은 ‘나만의 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른들 눈에는 그저 한가로운 들판이었겠지만, 내 안에서는 작은 우주가 조용히 팽창하고 있었다.
그런 버릇은 지금도 남아 있다. 버스 창에 이마를 대고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거나, 찻잎이 가라앉는 모양을 따라가며 제멋대로 상상의 가지를 뻗다 보면 시간 감각이 느슨해진다. 오래전 잃어버린 구슬들은 어디로 굴러갔을까. 손에서 놓쳤던 것들과 말하지 못하고 삼켜 버린 말들도 거기에 섞여 굴러갔을 것이다. 사라진 줄 알았던 그 희미한 빛이 나를 향해 굴러오는 것만 같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