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변한 도시숲

입력 2025-12-12 00:15
흔히 '정원 가꾸는 일' 정도로만 알고 있는 조경에 대해 저자는 "인간에게 자연을 돌려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철도와 침목, 자갈을 보존하고 설계된 자연을 옮겨 온 '경의선 숲길'이 또 다른 풍경으로 되살아난다. 유청오, 21세기북스 제공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아는 게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로 뒤집으면 쉽게 말뜻을 이해할 수 있다. 조경에도 딱 들어맞는다. ‘조경’이라고 하면 대게 ‘나무 심고 정원을 가꾸는 일’ 정도로 알고 있다. 생태조경 전문가인 저자는 조경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 잃어버린 자연을 되찾게 하는 것, 즉 “인간에게 자연을 돌려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조경 속에는 의도가 있고 설계가 있다. 그 섬세한 의미를 읽어 낼 때 도시는 전혀 다른 세계로 보이게 된다.


서울 마포구에서 용산구까지 이어지는 ‘경의선 숲길’은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다. 과거 일제강점기 때 경성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 일부였지만 2004년 지하화 공사가 이뤄지면서 도심 한가운데 버려진 철길로 남아 있었다. 다양한 활용 방안이 논의되다 도시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숲길에 나무를 심고 배치하는 데에도 조경가의 세심한 설계가 녹아 있다. 연남동 구간에는 은행나무를 심어 가을이면 황금빛 터널을 연출했고, 신수·대흥·염리동 구간에는 메타세쿼이아와 느티나무 숲을 조성해 한여름 녹음을 경험하게 했다. 대흥동 일대엔 봄꽃이 집중 배치돼 있다. 숲길을 찾는 시민들이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느낄 수 있도록 구간별로 수종을 달리 선택한 것이다.

경의선 숲길에는 철도의 침목과 자갈, 낡은 교량이 남아 있다. 과거를 지우지 않고 현재적 의미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저자는 “그 자리에 서는 사람들이 과거의 시간을 느끼고 변화를 이해하며, 현재와 미래를 연결짓도록 하는 문화적 장치”라고 설명한다. 과거 도시 재생 공식이었던 낡은 것을 철거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방식을 탈피한 ‘보존적 재생’의 선구자는 선유도 공원이었다.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서남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이 있던 곳은 2002년 친환경 생태공원으로 재생됐다. 송수 펌프실은 선유도와 한강의 역사를 담은 전시 공간이 됐고,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걷어내고 기둥만 남은 곳은 정원으로 재탄생했다. “기존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새로운 삶을 불어넣는다”는 새로운 전통은 서울 마포구 월드컵공원 인근 문화비축기지로 계승됐다. 원래 국가 비상시설로 석유를 저장하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은 문화 공간과 환경 교육장으로 변신했다.

자연을 읽어내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저자는 프랑스 루이 14세가 조성 베르사유 정원에서 ‘복종의 언어’를 읽어낸다. 베르사유 정원은 직선의 수로와 기하학적 축선이 동일하게 다듬어진 나무들로 구성돼 있다. 왕의 권력은 베르사유 정원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반면 창덕궁 후원은 ‘조화의 언어’로 자연을 불러온다. 자연스러운 곡선이 흐르는 창덕궁 후원은 누가 설계했는지 드러나지 않아 오래전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뜻을 읽고 따르는” 미덕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현대 도시공원은 ‘평등의 언어’로 설계된 공공의 정원으로 진화했다. 시초는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다. 산업화 시대 숨 막히는 도시 안에는 녹지가 거의 없었다.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은 교외 별장이나 사유 정원뿐이었다. 1870년대 초에 완성된 센트럴 파크는 베르사유 정원처럼 인공적이지도 않고 야생처럼 위협적이지도 않은 ‘제3의 자연’을 옮겨와 누구나 밤낮없이 찾아와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저자는 센트럴파크가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를 물었다면 오늘의 공원은 “자연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말한다.

조경은 인간에게 자연을 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부수적인 효과로 도시를 변모시킨다. 싱가포르는 조경을 국가 전략으로 삼았고 ‘자연 속의 도시’로 거듭났다. 싱가포르 첫 관문인 창이 공항과 연결된 복합공간 ‘주얼 창이’는 압도적인 높이의 인공 폭포와 열대 우림을 실내로 옮겨 놓은 듯한 경관을 만들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공항이 아니라 오래 머물면서 즐기는 공간이 됐다. 사람들의 체류 시간이 늘어나면서 면세점과 식당의 매출은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창이 공항의 비 항공 수익이 전체 수익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저자는 “조경이 비용이 아니라 국가 차원 투자라는 점을 싱가포르는 구체적인 성과로 증명하고 있다”고 말한다.

조경의 혜택을 과학적인 수치로 입증하는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도시공원에서 두 시간 머문 사람들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는 평균 15% 감소하고 면역력이 향상된다. 또한 적절히 설계된 녹지 공간은 범죄를 예방하고 자살자 수를 감소시킨다. 저자는 “조경이 ‘있으며 좋은 것’에서 머무는 선택지가 아니라 필요한 도시 인프라가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다. 조경의 혜택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가’라고 저자는 묻는다. 도시의 녹지는 고르게 있지 않다. 녹지가 있는 곳은 살기 좋은 곳이 되고, 살기 좋은 곳에는 다시 녹지가 조성되는 환경 불평등이 발생한다. 환경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저자의 제안은 흥미롭다. 바로 학교를 마을의 공원으로 바꾸는 일이다. 저출생으로 비어가고 있는 학교는 도시 전역에 균등하게 분포해 있다. 이미 공공의 소유고, 부자 동네에도 변두리 동네에도 있다. 저자는 “거대한 공원 하나가 아니라, 걸어서 10분 거리마다 존재하는 ‘작은 숲’, 그 숲의 이름은 학교일 수 있다”면서 21세기 우리 도시에 필요한 답이라고 말한다.

⊙ 세·줄·평★ ★ ★

·조경의 의미를 알면 도시가 다르게 보인다
·강남이 침수될 때 광화문은 멀쩡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학교를 공원으로, 흥미로운 제안이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