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일본 홋카이도 지역으로 강제 징용됐다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던 한국인 희생자 115명의 유골이 70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왔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년 9월 18일이었다. 책은 유골 발굴과 국내 송환의 긴 여정을 담았다. 이야기의 중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던 고(故) 정병호 한양대 명예교수다. 지난해 작고한 정 교수가 남긴 구술 녹취록을 바탕으로 국내외 동료와 제자들이 힘을 모아 엮었다.
미국 일리노이대학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던 정 교수는 1989년 가을, 홋카이도를 찾았다. 한국과 일본의 어린이집 비교 연구를 위한 현장 연구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곳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도노히라 요시히코를 만나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홋카이도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에 수많은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가 동원됐고, 고된 노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매장됐다는 것이었다. 이미 도노히라는 일부 유골을 발굴해 화장까지 한 상태였다. 마음이 움직였지만 박사 논문이 급했던 정 교수는 후일을 기약하며 일본을 떠났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된 정 교수는 학생들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 그렇게 97년부터 2013년까지 유골 발굴이 이어졌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다양한 사람이 참여했다. 재일동포들도 민단과 총련을 가리지 않았다. 정 교수는 “국적, 배경, 동기와 관심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고 말한다. 정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이 함께한 유골 발굴 작업을 “새로운 세대 간 진정한 만남과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장으로 키워나간다.
유골 발굴 작업을 계기로 만들어진 ‘한일대학생공동워크숍’은 한일 양국 학생들의 주기적 만남을 가능케 했다. 워크숍은 식민지 피해자와 민족 문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소수자 문제까지 포괄하는 자리가 됐다. 정 교수는 특히 “통일돼도 우리는 차별받을 것 같다.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일본에서도”라는 재일동포 청년의 말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이들이 자기 안에 자리한 ‘소수자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가 개별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고 보편적 원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 감수성에서 연대의 가능성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정 교수는 생의 마지막까지 동아시아의 평화를 마음에 품었다. ‘평화 디딤돌’ 프로젝트는 그의 역점 사업이었다. 독일 베를린 거리에서 ‘걸림돌’이라는 의미의 ‘슈톨퍼슈타인’와 마주친 것이 계기였다. 보도 곳곳에 놓인 황동판에는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거나 학살된 유대인의 이름과 출생, 사망 연도, 나치에 끌려간 해 등이 새겨져 있다. 일상의 공간에서 국가 권력의 폭력성을 기억하면서 반성을 유도하는 장치였다. 그는 “기억은 과거를 되새기고 오늘을 딛고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평화의 소녀상’ 곁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기억하기 위해 시작된 ‘평화디딤돌’은 일본 각지 강제노동 현장에도 놓였다. 그에게 평화디딤돌은 숫자로만 남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상의 공간으로 다시 불러내는 ‘기억의 상징’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유린당한 삶의 진실을 확인하는 ‘진실의 상징’이다. 그리고 역사적 진실을 바탕으로 진정한 민족 간 화해와 인류의 평화를 함께 모색하는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해자의 책임은 흐려지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지워진 채 과거를 묻지 않는 ‘미래 지향’만이 강요되고 있는 기이한 기억의 공백 상태에 문제의식을 품었으면 한다.” 정 교수의 묵직한 한 마디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