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는 왜 한국에서 뮤지컬로 팔릴까

입력 2025-12-11 01:02
서울 GS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배우 박정민이 주인공 파이 역을 맡아 연기하고 있다. 에스앤코 제공

GS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라이프 오브 파이’(~내년 3월 2일까지)는 올겨울 최고 화제작 중 하나다. 해외에서는 연극으로 분류되지만, 국내에서는 뮤지컬로 관객과 만나면서 장르 분류의 혼선과 공연 시장 왜곡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동명 소설을 무대화한 작품으로, 공연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권위있는 미국 토니상과 영국 올리비에상에서도 연극 부문 다관왕에 올랐다. 영국과 미국의 주요 티켓예매사이트에서도 연극으로 분류됐다.

실제로 노래가 거의 없고 음악 사용도 적은 편인데 한국에서는 유독 뮤지컬로 판매 중이다. 제작사 측은 연극도 뮤지컬도 아닌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는 새로운 장르로 규정하며 나름의 논리를 제시했지만, 원래 라이브 공연 전반을 가리키는 표현에 가까워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같은 사례는 ‘라이프 오브 파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태양의 서커스 ‘쿠자’,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와 ‘점프’, 이은결의 ‘트랙’ 마술 공연은 별도 카테고리가 없어서인지 뮤지컬에 포함돼 있다. ‘슬립 노 모어’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해외에서 연극으로 분류됐지만 뮤지컬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다.

국립창극단의 공연도 과거에는 모두 전통으로 분류됐으나 창극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장르가 점점 바뀌었다. 국립창극단 ‘배비장전’의 경우 2012년 초연과 이듬해엔 전통, 2014년과 2016년엔 연극, 2021년엔 뮤지컬로 분류됐다. 같은 작품이 세 장르로 올라간 것이다.

이처럼 작품이 실제 장르와 다르게 국내 티켓예매사이트에 등록되는 것은 제작사나 극장의 결정이다. 그 배경에는 공연 시장에서 뮤지컬의 인기가 압도적이라는 점이 있다. 한국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지난해 뮤지컬 분야 매출은 4551억원으로, 연극·클래식·오페라·무용·국악 등을 포함한 전체 공연 매출 6678억원의 약 70%에 달했다. 팬층이 두터운 뮤지컬로 분류될수록 많이 노출돼 홍보 효과가 커지는 구조다.

티켓 가격 차이도 뚜렷하다. 연극은 올해 기준으로 연예인이 많이 출연한 대극장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12만원으로 최고가를 찍었다. 다만 이런 작품은 손꼽을 정도로 적고, 전반적으로 제작사 연극의 경우 최고가 6~8만원대, 극단 연극은 3~4만원대를 형성하고 있다.

반면 뮤지컬은 대극장 기준으로 라이선스 공연이 최고가 16~18만원, 내한 공연은 19만원까지 형성돼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16만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슬립 노 모어’는 19만원이다. 세 작품이 해외에서처럼 연극으로 분류됐다면 다른 연극과의 가격 격차가 훨씬 더 두드러졌을 것이다.

이런 장르 바꾸기는 관객에게 공연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뿐 아니라 공연 시장 전반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뮤지컬에 집중된 시장 구조에서 연극과 전통 분야의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채 주변부로 밀려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최근에는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 어려운 융복합 공연도 늘고 있다. 티켓예매사이트의 장르 분류 체계를 손보고, 랭킹 역시 장르별이 아니라 극장 규모별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할 때가 됐다. 다양한 공연 단체와 관계자들 그리고 티켓예매사이트들의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