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꽤 크게 수학 학원을 운영하던 차성원(가명·73)씨는 지난 2020년 코로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학원 문을 닫았다. 사업 실패와 함께 건강도 잃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가족들마저 차씨를 떠났다. 그는 무너졌다. 절망에 빠져 주변의 모든 도움을 거부한 채 은둔 생활을 하던 차씨는 결국 반강제로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치료 목적 없이 병원에 장기 입원하는 이른바 ‘사회적 입원’이었다.
5년 동안 이어진 요양병원의 생활은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생존’의 연속이었다. 차씨는 당시를 “저승 앞에서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자고 일어나면 옆 병상에 있던 환자가 죽고 없어지는 걸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선이 무너졌다. 창문만 보면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그럴 힘조차 없었다.
그런 차씨에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지난 6월 병원을 찾은 광주시청 복지사는 차씨에게 “통합돌봄 제도라는 게 있는데 밖으로 나가보시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무슨 제도인지도 몰랐지만 일단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복지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차씨는 그렇게 광주시 통합돌봄 서비스 대상자가 됐다.
차씨에게 담당 공무원이 배정됐고 차씨만을 위한 맞춤형 돌봄계획이 수립됐다. 거주지가 마땅치 않은 차씨에게 LH주거복지 혜택이 적용되면서 차씨는 광산구 우산동에 있는 임대아파트로 옮겨졌다. 당뇨와 우울증이 심한 차씨의 건강상태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기 위한 방문진료, 거동이 불편한 차씨의 식사 등을 책임질 요양보호사가 장기요양보험제도를 통해 연계됐다.
기존 복지제도로는 충분치 않아 그 틈새를 메우는 광주시만의 서비스가 추가됐다. 차씨의 신체활동과 정서 지원을 위해 가정에 방문해 간병을 제공하는 단기 돌봄 서비스인 일시재가와 간호사가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방문간호까지 돌봄계획에 포함됐다. 차씨는 10일 “이 집에서 따뜻한 밥 한 그릇 먹는 것도 감사한 마음”이라며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앱으로 의사에게 당뇨 수시 보고
10일 오전 10시. 차씨의 집 인근에 있는 우리동네의원 소속 윤영애 간호부장이 차씨 집을 찾았다. 윤 부장은 “아부지, 나 왔어”라며 익숙한 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윤 부장은 차씨에게 “처음엔 나한테 죽는 주사 놔달라더니 지금은 어뗘”라고 물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 해”라는 차씨에게 윤 부장은 “그럴 때 전화를 하셔. 산책 나가게”라고 말했다.
조금 뒤 같은 의원의 임형석 원장이 들어왔다. 약봉지를 한 보따리 챙겨온 임 원장은 “단백뇨 수치가 떨어지긴 했지만 콩팥 기능이 아직 나빠요” “우울증 약은 바꿔보려 하고 있어” 등 한참을 설명했다. 이어 “허벅지에 힘 한 번 줘보소”라며 차씨의 몸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임 원장은 “다리에 힘이 많이 붙었응께 날씨 풀리면 전동휠체어 타고 밖에 나가야지. 어르신 같은 경우 또 있었어. 밖에 못 나가다가 1년간 팔힘쓰기 연습해서 지금은 잘 돌아다닌다니께”라고 차씨를 격려했다.
윤 부장은 커다란 방문간호 가방을 열어 혈압체크기를 꺼내 차씨의 혈압을 쟀다. 임 원장과 윤 부장은 차씨의 집 곳곳을 돌아다니며 벽과 화장실에 설치돼 있는 손잡이가 멀쩡한지, 더 필요한 건 없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임 원장과 윤 부장이 있는 우리동네의원은 차씨처럼 거동이 불편한 재가 환자에게 방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1차의료 방문진료 수가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광주시 통합돌봄 서비스를 통해 차씨를 담당하게 됐다. 임 원장은 한 달에 1번, 윤 부장은 한 달에 적게는 2번, 많게는 5번까지 차씨 집을 방문한다. 처음 차씨를 맡았을 때는 당뇨가 너무 심하고 콩팥 합병증까지 있어 수시로 들여다봤다. 반년가량 지난 지금은 많이 호전돼 차씨 혼자 인슐린 주사도 놓을 수 있게 됐다.
이들은 직접 찾아가지 않을 때에도 차씨의 건강상태를 점검한다. 차씨가 혈당을 재서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에 입력하면 임 원장은 진료실에서 이를 곧장 확인한다. 차씨도 혈압과 혈당 등을 기반으로 매주 자신의 건강상태가 어떤지 이 앱에서 볼 수 있다. 차씨는 “세상 밖으로 나오고 나서 이렇게 헌신하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며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가 되고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증빙서류 불필요, 신청 안 해도 간다
2023년 4월 시작한 ‘광주다움 통합돌봄’은 정부 돌봄 서비스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8월 직접 광주를 찾기도 했다. 내년 3월부터 전국에서 일제히 시행될 통합돌봄 정책도 광주시 통함돌봄 모델을 기본으로 설계됐다.
광주시 통합돌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증빙서류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복지제도는 그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기 위해 소득이나 재산, 건강상태 등 기관에서 발급한 증명서를 요구한다. 이런 증명서가 없으면 도움이 필요한데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광주시 통합돌봄의 첫 사례도 이 같은 경우였다. 2023년 사업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됐을 시점, 한 주민이 ‘이웃집에서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난다’고 신고해 가정방문을 나갔다. 5번이나 찾아가 설득한 끝에 문을 열었더니 59세 남성이 허리를 다쳐 움직일 수가 없어 그동안 용변을 이불에 봤던 상황이었다. 막노동으로 먹고살던 터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는데 허리를 다쳐 일은 끊기고, 정부로부터 뭐라도 도움을 받으려면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 제출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불가능해 자포자기 상태였다.
광주시는 이 남성을 통합돌봄 1호 대상자로 결정하고 기초수급 연계, 방문목욕, 대청소 및 방역·방충 서비스 등을 제공했다. 남성의 사정을 알게 된 이웃 주민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새 이불도 사줬다. 통합돌봄 서비스로 재기한 남성은 이제 서비스를 종료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렇게 광주시 통합돌봄 서비스는 연령이나 소득·재산, 장애, 진단서 유무 등에 상관없이 제공된다. 신청도 꼭 본인이 할 필요가 없다. 누구라도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면 신청할 수 있다. 구청이나 주민센터에 신청이 들어오면 무조건 가정방문을 나가 돌봄 필요도를 평가한다.
선제적으로 대상자를 발굴하기도 한다. 75세 이상 노인 장기요양 재가급여 등급자, 지체·뇌병변 등 심한 장애인, 복지사각지대 발굴시스템 위기정보 중 의료비 과다 지출자 등을 의무방문 대상자로 선정하고 직접 찾아가 통합돌봄이 필요한지 여부를 확인한다.
돌봄 대상자 및 서비스 항목 확대
광주시 통합돌봄은 대상자를 기존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이를 우선적으로 연계하고, 기존 제도에 없는 빈틈을 메우는 광주시만의 13가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크게 생활돌봄, 의료돌봄, 주거돌봄 등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눠진다.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생활돌봄은 음식 조리 및 배달, 방문목욕, 외출 동행, 가사 및 신체활동 등으로 구성돼 있다. 건강을 지원하는 의료돌봄에는 물리치료사나 작업치료사 등의 방문맞춤운동, 치과위생사가 구강상태를 점검해주는 방문구강교육, 약사가 중복 과다 약물복용을 지도하는 다제약물 관리 등이 있다. 주거안전을 지원하는 주거돌봄은 낙상예방 장치나 가스타이머를 등을 설치해주는 안전생활환경, AI안부전화, 케어안심주택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의료진 협조는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물리치료나 구강 점검 등은 직역별 협회와 연계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광주에는 방문진료에 전념하는 8개 의원급 병원도 선정돼 있다. 지역주민 누구나 신청할 수 있고, 신청을 받은 공무원들이 돌봄계획을 세우며, 이 계획에 맞춰 여러 직군이 투입된다. 사실상 광주시 전체가 통합돌봄의 주체인 셈이다.
광주시는 서비스 대상자와 항목을 점차 늘릴 계획이다. 지난해 12월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 돌봄 지원이 대표적인 예다. 광주시는 사고 사망자가 돌보던 아이들이 방치됐다는 사연 등을 접한 뒤 돌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긴급회의를 열어 서비스 지원을 결정해 총 49가구 64명이 87건의 서비스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12·29여객기참사특별법’에 재난 시 일상돌봄을 지원한다는 조항이 반영됐다. 이 밖에 범죄피해자 지원, 가정폭력 피해아동 지원 등도 이뤄질 예정이다.
서비스 항목에는 방문 이미용을 추가하는 등 단순히 의식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안도 강구 중이다. 광주시청 통합돌봄과 김기숙 주무관은 “시청 직원들과 구청 직원들, 구청 직원들과 동 직원들이 매달 치열하게 회의하며 더 좋은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며 “시청과 5개구, 96개 동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니까 힘이 발생한다. 광주 통합돌봄이 잘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광주=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