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평생을 침대에서 보낸 하랑이를 지난 9월 경기도 고양 자택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아이의 방을 채우는 건 장난감이 아니라 인공호흡기와 가래를 뽑는 흡입기, 산소포화도 측정기였습니다. 하랑이는 목에 연결된 튜브에 의지해 24시간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줄여 지은 이름, 하랑. 예수아(35)씨 김민규(35)씨 부부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이름을 지어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하랑이는 30주를 채우지 못하고 뇌 손상을 입은 채 1.46㎏ 이른둥이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하랑이가 오래 살 가망이 없다는 의료진의 말에도, 부부는 미리 지어둔 이름처럼 이 작은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로 여겼습니다.
하랑이가 커갈수록 이들 가족에게 집 바깥은 점점 먼 세상이 됐습니다. 하랑이의 몸이 성장하면서 무거운 의료장비와 아이를 한꺼번에 실을 만한 유모차도 휠체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그때부터 사설 구급대에 의존해서 외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었습니다.
예씨 부부는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98가정의 이야기를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이런 간절한 목소리들을 모아 국내 유모차 기업 ‘와이업’을 찾아가 들려줬고, 이 업체는 선뜻 개발비용을 부담하고 하랑이를 위한 유모차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국민일보 2025년 10월 1일자 33면 참조). 그 용기 있는 두드림이 올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또 다른 변화를 불렀습니다. 국민일보 보도 이후 이 소식을 알게 된 밀알복지재단과 세브란스병원이 동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세상에 없던 유모차를 만들기 위해 공장을 가동하려면 한 번에 최소 200대 이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씨 부부가 홀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높은 벽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밀알복지재단이 용기를 냈습니다. 재단은 유모차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프로젝트형 모금’이라는 가보지 않았던 길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미리 확보된 예산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믿음으로 나선 것입니다.
이제 밀알복지재단과 예씨는 가장 절실한 가정이 소외되지 않고 잘 전달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이 논의를 돕기 위해 세브란스병원 완화의료팀 ‘빛담아이’가 자문으로 힘을 보태기로 했습니다. 병원 측은 의료진의 전문적 시각이 담긴 ‘중증도 체크리스트’에 대한 자문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빛담아이 의료진은 “하랑이와 같은 중증장애아동은 병원에 한번 오면 대기 시간만 반나절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며 “몸이 커버린 아이와 의료장비를 제대로 된 유모차 없이 감당하는 건 너무 버거운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누워만 있는 아이가 산책을 한다고 뭘 알겠냐고 묻지만, 내밀한 소통을 하는 부모는 아이가 몸으로 심박수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다 느낀다. 아이의 몇 안 되는 기쁨을 지켜주고 싶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가장 먼저 손을 내민 와이업의 연구실은 ‘하랑이 유모차’를 만들기 위해 밤늦게까지 불을 켜둡니다. 최근 해외 공장에서 제작된 새 유모차 시제품은 좌석 길이를 110㎝까지 늘렸고, 무게를 10㎏대로 맞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랑이의 이름을 딴 200대의 유모차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요. 필요한 만큼 후원이 모인다면 추위가 지나가고 다시 벚꽃이 필 때쯤인 내년 4월 유모차가 하랑이와 같은 아이들에게 전달될 예정입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분들은 “저희가 맡은 작은 역할을 끝까지 해내어 하랑이와 친구들에게 따뜻한 봄을 선물하고 싶다”고 입을 모읍니다. 하랑이가 쏘아 올린 기적이 이어지기 위해, 먼저 나선 이들이 또 다른 이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