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한국, 기업하기 좋은 나라

입력 2025-12-13 00:38

SK텔레콤과 쿠팡 등 여러 기업을 통해 내 개인정보가 팔려 나갔지만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받은 적이 없다. 한국인의 개인정보는 전 세계 곳곳으로 유출돼 K팝, K푸드처럼 ‘K개인정보’가 된 상황이다.

이런데도 개인정보 유출로 기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거나 피해자에게 정당한 배상을 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 없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도 든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 책임을 지지 않는 게 아닐까.

쿠팡이 3370만건 넘는 개인정보를 유출했지만 아직 피해 배상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너무 미안해야 할 일 같은데 쿠팡 창업자이자 실질적 소유주인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의 사과 한마디도 없다. 사실상 무대응에 가깝다. 쿠팡의 첫 번째 사과문에서 개인정보 ‘유출’을 ‘노출’로 표기한 것을 봤을 때는 ‘하하’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단어 하나로 책임을 피해 보려는 모습은 현재 한국 이커머스 시장의 절대 강자의 모습과 간극이 너무 컸다.

정부의 규제와 노동시장의 경직성, 높은 세금 부담 등의 이유로 ‘한국은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경제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들의 주장은 실제로 타당한 점이 있다. 하지만 기업하는 사람으로서도 한국만의 장점(?)이 있다.

개인정보 유출에 대해 거의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해커들의 수법이 고도화되는 시점에서 이는 앞으로 더 큰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 이 사실을 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쿠팡의 주가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무거운 책임을 진 사례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 JP모건은 쿠팡의 정보유출 사태 이후 “한국 고객은 데이터 유출에 대해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분석에 모욕감이 들었지만 허황된 분석은 아니다. JP모건도 나름대로 과거 사례에 기초해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또 터지면 화도 나겠지만 “한국인 개인정보는 공공재”라는 자조적인 말을 나눌 뿐이다. 배상을 받은 적도 없고, 요구를 해도 좌절돼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2011년 SK커뮤니케이션즈 해킹으로 약 3500만명의 정보가 유출됐지만 실질적 배상은 없었다. 1심 재판부가 위자료를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회사 책임이 없다고 봤다. 2014년 카드 3사(KB국민·롯데·농협카드)의 개인정보 1억건 유출, 2016년 인터파크의 개인정보 2500만건 유출, 올해 SK텔레콤·롯데카드 등 연이어 발생하는 사고까지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이 미국에서 소송해보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큰 변화다. 과거와 달리 승산이 있어서다. 다행히(?) 쿠팡의 본사는 미국에 있고 미국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있다.

중대한 과실이 있는 기업에 대해선 배상 규모가 크게 매겨진다. 미국이라면 쿠팡이 1년 매출액을 뛰어넘는 수십조원의 배상금을 내게 될 것이라는 법조계 추산도 있다. 한국 법무법인 대륜의 현지 법인인 미국 로펌 SJKP는 쿠팡 아이엔씨(Inc)를 상대로 미국 뉴욕 연방법원에 소비자 집단소송을 공식 제기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제대로 처벌할 방법이 없어 미국으로 향해야 하는 상황을 보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국 기업의 잘못을 한국 법으로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 사회의 법과 제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걸까.

정부와 국회는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 발생 시 기업 매출액의 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하는 법 개정을 추진키로 했다. 매년 해킹 사고가 끊이지 않는 상황을 고려하면 시급하다.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는 두렵다. 나는 쿠팡과 같은 주요 기업이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하나의 해프닝처럼 여기는 모습을 국민이 함께 목격하면서 이를 학습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정보 유출은 사소한 실수라고. 3000만건 이상이 유출돼도 솜방망이 처벌로 끝난다고. 팽팽했던 국민의 법적, 윤리적인 마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거창하지만 개인정보 유출에 제대로 된 책임을 묻는 것은 단순히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함이 아니라 한국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제대로 묻는 사회여야 책임을 지는 사람이 나고 자란다.


이광수 경제부 기자 g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