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근로시간만 줄이고 유연성 막으면 산업이 버틸까

입력 2025-12-11 01:30

현대자동차 새 노조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주 35시간제와 주 4.5일제를 밀어붙일 태세다. 새 노조는 현재 주 40시간인 근무 시간을 연구·일반직과 전주공장부터 35시간으로 즉시 줄이고, 이후 다른 공장으로 단계적 확대를 공약했다. 연구·일반직은 주 4.5일제, 기술직(생산직)은 하루 1시간 단축하는 내용이다. 국내 최대 단일사업장 노조인 현대차 노조가 이를 관철할 경우, 파장은 자동차 산업을 넘어 산업 생태계 전반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근로시간 단축이 근로 복지 향상에 기여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재명정부가 주 4.5일제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민주노총이 오랫동안 숙원으로 요구해온 것도 장시간 노동 관행을 개선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지적 명분만으로 우리 사회의 생산성과 산업구조가 과연 이를 감당할 성숙도에 도달했는지, 또 정책 설계가 산업 경쟁력과 충돌하지 않는지는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첨단 산업에서는 이미 치열한 속도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 반도체 업계는 ‘996 근무제’(오전 9시~오후 9시, 주 6일)를 통해 혁신에 속도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근무 유연성은 외면한 채 근로시간 단축만 획일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우리 기업의 숨통을 조이는 일이다. 그럼에도 국회는 노동계의 요구만 앞세운 채, 산업계가 절실히 호소해온 ‘주 52시간제 유연 운용’에는 귀를 닫고 있으니,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어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첫 민관 합동 ‘반도체 전략 육성 보고회’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정작 산업 현장의 핵심 병목인 ‘시간의 유연성’ 문제를 풀지 않은 채, 선언적 구호와 지원 방안만 나열해서는 반도체 주도권 경쟁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고용노동부가 주 4.5일제 도입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내년도 예산까지 확보해 놓은 것은, 현대차 노조 등 노동계의 요구를 정부가 사실상 뒷받침하겠다는 신호로 읽힐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감축이 아니라 산업별 특성과 생산성을 반영한 노동시간 제도의 정교한 재설계, 그리고 글로벌 경쟁 환경을 고려한 유연성 확보다. ‘복지냐 성장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설 때만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다. 규제로만 둘러싸인 구조에서는 산업이 숨 쉴 여지가 없다. 이 정책적 모순을 방치한다면, 한국은 치열한 글로벌 전쟁터에서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